고려 역대왕

태조


■ 출생과 성장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고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으로 송악(개성)에서 출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후삼국시대에 궁예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그 세력이 송악에까지 미치자 궁예의 부하가 되어 그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주에서 견훤의 군사를 무찌르는등 군사활동에 있어서 큰 공을 세웠다.
900년에는 광주(廣州), 충주, 청주 및 당성(唐城: 지금의 南陽), 괴양(槐壤: 지금의 槐山) 등의 군현을 쳐서 이를 모두 평정, 그 공으로 아찬(阿飡)이 되었다. 이어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군(錦城郡)을 공격, 이를 함락시켜 그 부근 10여개의 군현을 쳐 나주를 설치,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어 이해에 그동안 쌓은 공으로 알찬(閼飡)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波珍飡)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

■ 고려의 건국
그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하여야만 하였다. 환선길(桓宣吉), 이흔암(伊昕巖) - 한편으로는 이 이흔암의 모반사건은 조작되었을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등의 반역사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강대한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이와같은 어려운 과제에 기민하고 탄력성있게 대처해 나감으로써 난국을 극복하여 나갔다.
태조가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정책은 민심 안정책이었다. 따라서, 신라 말기 이래 크게 문란하여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제도적 조처를 취하였다. 취민유도(取民有度)의 표방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신라 말기 이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나갔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략적으로 혼인하였으며, 각 지방의 호족 및 그 자제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태조는 후삼국시대의 지배세력인 궁예나 견훤에게서는 볼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정치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량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919년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 후백제, 고려의 후삼국 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920년 부터였다.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친화정책을 썼다.
이해 10월에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으며, 이에 따라 후백제와 고려는 서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후백제와 결전하여 이기기 위해서는 신라와의 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후백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화전(和戰) 양면정책을 썼다. 이처럼 신라,후백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새 왕조의 안정과 국력신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대체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후백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원에 대하여 군사적 압박을 가중시켰는데 이는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려로서도 이 지역을 사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 후삼국 통일
930년 태조는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지방)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935년 후백제의 왕실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을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우하였으며, 또 같은해 10월에는 신라왕의 자진항복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후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하여졌다.
마침내, 936 년 왕실내분으로 혼란한 후백제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善山)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최후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왕건은 혼인 정책으로 호족세력을 끌어모은 것으로 유명한데, 왕건의 후비는 모두 29명이라 한다.
또 죽기 전 대광 박술희에게 훈요십조를 남겼는데 이후 역대 왕들이 좋은 계율로 삼아 정치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훈요 십조>
1. 국가의 대업은 부처의 호위를 받아야 하므로 사원 경영에 문란함이 없도록 하라.
2. 도선이 정한 곳 외에 함부로 절을 짓지 마라.
3. 왕위계승은 장남, 차남 그리고 형제순으로 한다.
4. 외국의 풍속을 무조건 본받지 마라.
5. 3년마다 서경에 1백일 이상 머물러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라.
6. 연등회와 팔관회를 시행하라.
7. 간언을 받아들이고 참언을 멀리하라.
8. 후백제 지역의 사람을 등용하지 마라.
9. 인사원칙에 충실하라.
10.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경사를 섭렵, 국정에 참고하라.


이같은 훈요십조는 그의 정치사상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밖에 태조는 통일직 후 <정계(政誡)> 1권과 <계백료서(誡百寮書)> 8편을 친히 저술하여 반포하였다. 이 저술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준수해야 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에는 전하지 않고있다. 그러나 천하의 왕건 태조도 943년 5월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떳다. 시호는 신성(神聖)이며, 능은 현릉으로 그의 제 1비 신혜왕후 유씨가 함께 묻혀 있다.

혜종


■ 출생과 성장
혜종은 태조와 장황왕후 오씨의 장남으로 912년 나주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은 무, 자는 승건이다. 젊어서부터 도량이 넓고 지용이 뛰어났으며, 936년(태조 19)태조가 후백제를 칠때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921년에 박술희(朴述熙)를 후견인으로 하여 태자에 책봉되고, 943년 태조가 죽자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를 노리는 강력한 적대세력 때문에 고전 하였다. 특히, 강력한 호족출신이며 왕실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쥐고 있던 왕규(王規)의 노골적인 암살음모를 가까스로 모면한 뒤에는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정치에 뜻을 두지 못하였다. 이는 다른 이복동생들과는 달리 그의 외척은 아주 미비한 집안이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의 이복동생인 요(堯: 뒤의 定宗)는 서경(西京:지금의 平壤)의 왕식렴(王式廉)세력과 결탁하여 은근히 왕위를 엿보고 있었으므로 혜종대의 정치정세는 더욱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그가 병석에 눕게 되자 왕위쟁탈 음모는 더욱 노골화되어, 서경의 왕식렴은 군대를 거느리고 수도에 들어와 왕규와 그 무리 300여명을 죽였다. 이 무렵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도 갑곶(강화)에 유배된 뒤 곧이어 살해 되었는데, 요 일파에 의하여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혜종이 죽은 뒤에 요가 새 왕이 되었는데, 그 절차가 혜종의 유언에 의해 서가 아니라, 스스로 군신(群臣)의 추대를 받은 것으로 되어있어 혜종의 죽은원인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혜종 때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불안과 갈등은 강력한 호족세력과 미약한 왕권관계에서 빚어진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는 여러가지 견해가 나와 있다. 능은 순릉(順陵)이며, 시호는 의공(義恭)이다. 혜종은 의화왕후 임씨를 비롯 후광주원부인 왕씨, 청주원부인 김씨, 궁인 애이주등 4명의 부인에게서 2남 3녀를 얻었다.

정종


■ 출생과 성장
정종은 신명순성황후 유씨 소생으로 이름은 요, 자는 천의이다. 923년에 태어난 그는 신명순성왕후의 두번째 소생이며 태조 왕건의 셋째아들이다. 정종 요는 강격한 호족세력인 충주 유씨가 그의 외가였기 때문에 혜종보다는 지지기반이 튼튼하였다. 성격은 강인하였으며 고집스러웠으면서도 불심이 깊고 고구려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신념이 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혜종의 뒤를 이어 945년에 즉위하여 서경의 진장(鎭將) 왕식렴(王式廉)의 도움으로 왕규(王規)·박술희(朴述姬) 등 정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러한 사실은 혜종 사후에 전개된 일련의 호족들의 발호를 제압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개경의 호족들은 여전히 반발하여 왕권이 확고한 지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도참설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서경천도를 서두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서경천도는 백성들의 많은 인력을 강제 동원하여 민심을 이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오히려 개경의 호족과 백성들의 불만을 고조시키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결국 이 계획은 좌절되고, 왕권은 여전히 불안한 상태에있었다. 그러다가 948영 9월에 동여진의 대광 소무개 등이 말 7백필과 토산물을 바쳤는데, 이때 손수 이 물건들을 검열하다 갑작이 몰아친 우레와 천둥소리에 놀라 경기가 들었고 이후 병이 깊어갔다. 949년 3월인 재위 연수 4년, 향수 27세에 세상을 떠났다. 정종은 불교를 깊이 믿었다고 한다 문공왕후 박씨, 문성왕후 박씨, 청주남원부인 김씨등 3명의 부인과 경춘원군과 1명의 공주등 1남1녀의 자식이 있다.

광종


■ 출생과 성장
이름은 소(昭), 자는 일화(日華). 태조의 아들이며, 모후(母后)는 신명순성왕태후 유씨(神明順成王太后劉氏)이고, 정종의 친동생으로 정종의 선위를 받아 왕이 되었다. 비는 대목왕후 황보씨(大穆王后皇甫氏)와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林氏)이다. 왕자 시절에 그는 정종과 더불어 왕실세력의 핵심인물이었고 박수경.수문형제와 왕식렴 등의 서경세력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때문에 왕규와 박술희가 이끄는 개경세력을 제거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으며, 정종의 즉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 왕위등극
광종은 제2대 혜종, 제3대 정종에 비하여 여러 면에서 대조되며, 우선 재위기간도 혜종이 2년, 정종이 4년에 지나지 않았으나, 광종은 26년간 재위하였다. 그리고 혜종과 정종은 각각 박술희(朴述熙)와 왕식렴(王式廉)으로 대표되는 다른 강력한 세력기반에 의지하여 왕권을 부지하였으나, 광종은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쌓아 왕권을 확보하는 데 힘썼다. 광종은 고려 초기 왕권강화를 위하여 가장 끈기 있고 정력적으로 노력하여 큰 성과를 거둔 왕으로서 주목되고 있다.


■ 광종의 치세
크게 3기로 나눌수 있는데 그 첫번째 시기는 광종 즉위년∼광종 7년이며 이 시기에는 모색기에 해당하며, 두번째 시기는 광종 7년∼광종 11년로 왕권강화기의 시기이다. 세번째 시기는 광종 11년∼광종 26년으로 호족숙청기에 해당된다.

이를 더 상세히 알아보면, 첫번째 시기에는 왕권강화와 직접 관련되는 시책은 단행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내의 정치정세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최승로(崔承老)가 그 상소문에서 “ 광종의 8년 동안의 다스림은 가히 삼대(三代:夏·殷·周의 3대)에 견줄만하다.”고 격찬할 정도였다. 또한, 중국 왕조와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었고, 이러한 국내외의 정책을 통해서 새 국왕으로서의 지위 및 그 정치적 기반을 닦아나간 것으로 추측된다.

두번째 시기에는 호족세력의 제거와 왕권강화에 필요한 제도적인 조처를 취하였다. 956년에 노비의 안검법(按檢法)을 세웠으며, 958년에 과거제도를 시행하였고, 960년에는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이러한 조처들은 필연적으로 호족세력의 반발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광종은 철저한 탄압을 강행하였다. 956년부터 왕권강화책을 추진하게 된 데에는 중국 후주(後周)출신의 쌍기(雙冀)의 등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광종에게 왕권강화책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보좌한 사람은 바로 쌍기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우선 쌍기를 중용한 같은해에 노비안검법을 세운 것도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렵다. 쌍기는 후주에서의 왕권강화책의 경험을 고려사회에 살려보고자 했던 것이다.

세번째 시기에는 왕권강화책에 반발하거나 장애가 되는 호족세력에 대해 피의 숙청을 단행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960년에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보고하자, 광종이 이들을 귀양보내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 이후부터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뜻을 얻어 충량한 사람을 모함하고,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며, 자식이 그 부모를 참소하자, 영어(囹圄)가 항상 가득차서 따로 가옥(假獄)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죄없이 살육당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 왕권안정에 대한 집념은 매우 강렬하여 호족세력은 물론 골육과 친인(親姻)에 대해서도 자기에 대한 적대행위의 가능성을 항상 경계하고, 한번 의심이 가면 살육도 주저하지 않았고, 그 결과 혜종과 정종의 아들마저 비명에 죽게 하였다.
왕권강화책 추진에 필요한 독자적인 세력기반 육성에 주력하여, 958년부터 실시된 과거제도와, 독자적으로 육성한 군사력인 시위군졸은 문무 양면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세력기반이 되었으며, 이와같은 세력기반을 배경으로 정치적 적대세력을 과감하게 숙청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호족을 비롯한 정치적 적대세력의 반발도 거세어서 왕권강화책을 지지하고 후원해주는 보다 광범위한 세력기반 구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963년에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고, 이곳에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하여 각종 법회와 재회를 개설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정책을 펴나간 것은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귀법사의 승려 균여(均如)·탄문(坦文) 등을 통하여 호족세력에 반발하는 일반민중들을 포섭하고, 개혁을 지지해주는 사회적 세력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의 전생애에 걸쳐 왕권강화책을 추진한 결과, 태조 이래 열세에 놓여 있던 왕권을 호족세력보다 우위에 올려놓게 되었다. 일찍이 광종은 ‘광덕(光德)’ ·‘준풍’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수도인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명명하였고, 만년에는 ‘황제(皇帝)’라는 호칭까지 사용하였는데, 여기에서 왕권강화에 대한 의지와 집념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국가체제도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히게 되었지만, 이와 동시에 왕권의 한계성도 나타났다. 광종대의 왕권은 중앙정부 중심으로서 왕권 또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는 침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호족세력을 철저히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호족세력의 완전한 굴복과 왕권의 일방적 승리는 아니었다. 그가 죽고 경종이 즉위한 초에 대대적인 반 광종운동이 일어난 사실로써 미루어알 수 있다.
광종은 왕권강화책 이외에도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밖으로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고려 왕조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고, 안으로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여러가지 시책을 펴기도 하였다.
968년에는 혜거(惠居)를 국사로 삼고, 탄문을 왕사로 삼음으로써 고려의 국사·왕사제도의 단서를 열었다. 또한, 국방대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고려의 영역을 서북과 동북방면으로 더욱 확장시키는 동시에, 거란과 여진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의 치적은 뒤에 고려가 새로운 국가체제와 정치질서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여기에 그의 치적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시호는 대성(大成)이며, 능은 헌릉(憲陵:지금의 開城 狄踰峴)이다.
광종의 후비는 대목왕후 황보씨와 경화궁부인 임씨 두 사람뿐이다. 두사람 중 경화궁부인 임시는 자식을 낳지 못했고, 대목왕후 황보씨는 경종을 비롯하여 2남3녀를 낳았다.

경종


■ 출생과 성장
이름은 유, 자는 장민(長民). 광종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965년 2월11세의 나이로 왕태자, 내사, 제군사, 내의령, 정윤에 책봉되었다. 그가 왕태자로 책봉되던대는 이미 광종의 공포정치에 의해 많은 호족들이 희생된 상태였다. 960년에 평농서사 권신의 참소로 대상 준홍, 좌승 왕동 등이 내쫓긴 이래 광종의 호족 숙청작업이 본격화되었고, 965녀에는 박수경의 세아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호족 출신관료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부왕인 광종에 의하여 강력하게 추진된 호족세력 숙청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왕과의 관계마저 원활하지 못하여 불안하게 소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에 경종은 역모에 휘말려 죽음을 당할뻔하였지만 가까스로 위협을 모면하였다.


■ 왕위 등극
경종은 975년 5월 광종이 병으로 죽자 21세의나이로 왕위를 넘겨받았다. 경종은 독자적으로 정권을 담당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여, 즉위초에 왕선(王詵)을 집정(執政)으로 삼아 정권을 맡겼다. 이와 전후하여 광종 때에 참소당한 사람들의 자손들에게 복수할 것을 허락하자, 서로 함부로 죽이는 사태가 발생, 원성이 드높아졌다. 이와 같은 사태 발생을 통하여 광종 때 왕권의 한계성을 엿볼 수 있다. 즉, 광종은 그의 전생애를 바쳐 호족세력을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 경종 즉위초에는 잔존한 구세력에 의한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던 것이다. 976년 정권을 독차지하고 있던 왕선은 복수를 빙자하여 태조의 아들인 효성태자와 원녕태자를 함부로 죽여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왕선을 귀양보내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와 복수를 금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이와 동시에 순질(筍質)과 신질(申質)을 각각 좌집정(左執政) 우집정(右執 政)으로 삼고, 모두 내사령(內史令)을 겸하게 하였다. 정치권력의 독주를 막고, 이를 분산시키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 정치적 업적
경종 때의 정치적 업적으로서 주목되는 것은 전시과(田柴科)를 처음으로 제정한 것이다. 976년 처음으로 제정된 전시과는 제도적으로 미비한 점이 있었으나, 그것이 고려 전기 토지제도의 시초가 된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큰 것 이었다. 976년의 전시과는 관품의 높고 낮음을 논하지 않고, 다만 인품에 따라 제정 한 것이라고 표방하고 있다. 이와같은 변화는 광종 때 추진된 왕권강화책과 국가체제 정비의 결과로 나타난 새로운 역사적 상황의 반영이라 생각된다. 즉, 경종은 광종이 닦아 놓은 치적을 바탕으로 역분전보다는 발전된 토지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던 듯하다.


■ 정치적 성향
한편, 경종은 977년 친히 진사시를 주관하여 고응(高凝) 등 여섯 사람의 급 제자를 뽑았으며, 중국 송나라와의 국교도 돈독히 하여 사신의 내왕이 있었다. 979년 발해인 수만명의 내투(來投)가 있었으며, 청새진(淸塞鎭:지금의 熙川)에 성을 쌓기도 하였다. 이처럼 몇 가지 치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경종은 정사에 뜻이 없고 오락과 성색(聲色)에 몰두하였으며, 위기(圍碁)를 좋아하여 정교(政敎)가 쇠잔하였다. 그의 정치적 태도는 이미 즉위초에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김보(金傅)에게 상보도성령 식읍일만호(尙父都省令食邑一萬戶)의 봉작을 더한 것으로 보아, 신라계 정치세력을 두둔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한편 그의 모후인 대목왕후 황보씨로 대표되던 지방호족계통 정치세력도 용납할 수밖에 없었던 것같다. 이러한 상황이 경종 즉위초의 반광종(反光宗)의 기운을 낳게한 것이 아닌가 싶다. 980년 왕승(王承) 등의 모역(謀逆)이 있었으나, 최지몽(崔知夢)의 건의에 따라 미리 대비하여 왕승 등을 잡아 죽이고 위기를 넘겼다. 이러한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화합정치를 표방했지만 또 다시 시작된 정권다툼과 살인으로 인해 허망함과 죄책감으로 실달렸음이 분명하며, 그로인한 마음의 병이 깊어졌다. 981년 7월 병이 위독해지자 종제(從弟)인 개령군치(開寧君治:成宗)에게 왕위를 넘겼다. 시호는 헌화(獻和)이며 능은 영릉(榮陵)이다. 경종은 헌숙왕후 김씨, 헌의왕후 유씨, 헌애왕후 황보씨, 헌정왕후 황보씨, 대명궁부인 유씨 등 다섯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헌애왕후 황보씨에게서 1남을 얻는다. 바로 이가 제 7대왕 목종이다.

성종


■ 출생과 성장
이름은 치(治), 자는 온고(溫古). 태조의 손자이고, 대종(戴宗)욱(旭)(태조와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의 아들)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선의태후 유씨(宣義太后柳氏)이다. 981년 경종의 내선 (內禪)으로 왕위에 올랐다. 성종은 어머니 선의왕후가 일직 죽어 할머니 신정왕후 황보씨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유학에 밝고 인품이 뛰어나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유교적 정치이념을 실현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었으며, 그 명성에 걸맞게 즉위와 동시에 팔관회를 폐지하는등 숭유억불정책을 노골화하면서 새로운 통치체제를 구현하는데 주력하였다.


■ 왕위 등극
981년 7월 죽음이 임박해진 경종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6대 왕에 올랐으며, 이때의 나이는 22세였다. 성종이즉위하면서 고려는 비로서 진정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2목 설치 982년(성종 1) 6월에 경관(京官)5품 이상에게 봉사(封事)를 올려 시정(時政) 의 득실을 논하게 하였는데 이에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史上 柱國) 최승로(崔承老) 가 시무(時務) 28조(條)를 올렸다. 성종은 최승로의 정책 건의와 보좌를 받고 새로운 국가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먼저 지방제도의 정비에 대하여 살펴보면 첫째, 983년(성종 2)에 지방에 12 목(牧)을 설치하였는데, 이러한 지방관의 설치는 고려 건국 이래 처음 있 었던 일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큰 것이었다. 12목의 설치와 함께 금유(今有)·조장(租藏)은 혁파되었다. 12목의 설치 당시에는 지방관만이 임지에 부임하였으며, 가족의 동반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일이 지남에 따라, 986년에는 12목에 대하여 처음으로 처자(妻 子)를 데리고 부임하게 하는 제도적인 조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12 목사와 경학박사(經學博士)·의학박사(醫學博士) 각 1인씩을 뽑아 보내어 지방교육을 맡아보게 하는 한편, 유교적 교양이나 의술이 있는 사람을 중앙에 천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993년(성종 12)에는 12목에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여 물가 조절의 기능을 맡게 하였으니, 지방 각 관청의 경비 지출을 위한 공해전시의 법 을 정비하는 등 지방제도의 정비작업을 꾸준히 진행하여 지방행정의 기능 을 크게 강화시켰다. 특히, 995년(성종 14)의 지방관제 개편은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 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995년의 지방관제 개편에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10도제(道制)의 실시이다. 당(唐)의 10도제를 모방하여 제정한 것으로 생각되는 고려의 10도제는 곧 그 실시과정에서 유명무실해지는 약점이 있었으나, 우리나라 도제(道制)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절도사체제(節度使體制)로의 개편이었다. 즉, 종래의 12목을 12절도사로 개편한 것은 지방행정에 있어서 군사적인 면 을 크게 강조하고자 한 의지의 반영이었다. 절도사체제로의 개편은 군정적 인 지방행정을 통하여 지방의 호족세력을 통제함으로써 완전한 중앙집권을 하고자 꾀한 조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성육부의 중앙관제 성종의 치적으로서 특히 주목할 것은 새로운 정치체제의 정비였다. 흔히 삼성체제(三省體制)로 대표되는 새로운 정치체제의 개혁은 이미 982년부터 시작되었다. 즉 태조 이래의 정치기구를 중국식 제도로 개편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982년부터 983년 사이에 이루어진 새로운 정치기구는 내사문하성(內史門下 省)과 어사도성(御事都省)을 중심으로 하고, 어사도성 밑에 선관(選官)·병 관(兵官)·민관(民官)·형관(刑官)·예관(禮官)·공관(工官)의 6관(六官)이 예속되어 있었다. 이와같은 중앙관제는 995년에 다시 삼성육부로 개정되어 고려 중앙관제의 기본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의 관제내용은 998년(목종 1)에 개정된 전시과 (田柴科)관계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성종은 이처럼 새로운 정치체제를 중국의 제도를 수용하여 마련하였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중국식 제도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시행한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치적·사회적 여건의 성숙과 발전이 그러한 선진제도의 수용을 필요로 하게 된 것임을 특히 주 목할 필요가 있다. 숭유억불책 즉, 고려 건국 이래 엄청나게 늘어난 새로운 정치세력을 포용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정치체제로서는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종대의 정치적 지배세력의 성격은 그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즉, 성 종대 전반기에는 신라 6두품 계통을 중심으로 한 유학자의 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가, 그 후반기에는 이들 대신 개국공신 혹은 호족계열의 세력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신라시대에 비하여 권력구조의 핵에 참여 할 수 있는 신분층이 크게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성종은 이와같은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중국의 선진제도를 도입하고, 정치· 교육의 지도이념으로서 유교적 이념을 채택하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 었던 것 같다. 성종은 유학을 숭상하고 억불정책을 위하여 연등회와 팔관회를 폐지시켰는 데 그의 치적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유교주의적 정치이념을 펴기 위하 여 노력하였나를 알수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정치이념의 실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재를 등용하고자 애썼다. 또한 성종은 재위기간 중에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정하였으며, 태학에 재물 을 넉넉하게 하여 선비를 양성하고 복시(覆試)로써 어진 사람을 구하였으며, 수령을 독려하여 백성을 구휼하고, 효도와 절의를 권장하여 풍속을 아름답 게 하는 등,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시책을 정력적으로 편 결과 새로운 고려왕조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993년(성종 12) 거란족이 침입하였을 때 서희(徐熙)의 외교적 성과로 거란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강동 6주를 얻어 영토를 넓히게 되었다. 997년 10월에 병이 위독하여지자 조카인 개령군 송(開寧君誦:穆宗)에게 왕위를 전하고 내천왕사(內天王寺)에 옮겨 거처하였다. 시호는 문의(文懿)이고, 능은 강릉(康陵: 京畿道 開豊郡 소재)이다. 성종은 문덕왕후 유씨, 문화왕후 김씨, 연창궁부인 최씨등 세명의 부인을 두었다. 이들중 문덕왕후는 소생이 없었고, 문화왕후가 1년 연창궁부인이 1녀를 낳았다. 이 둘딸들은 나중에 모두 현종의 왕비가 된다.

목종


■ 출생과 성장
동성연애자인 목종은 980년 경종과 헌애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종이 죽었을 때 겨우 2세여서 당숙인 성종이 뒤를 잇고, 성종이 그를 궁 중에서 양육하여 990년(성종 9) 개령군(開寧君)으로 책봉하고, 후사로 지 명된 뒤 7년 만에 997년 10월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 첫해 12월 문무양반 및 군인전시과를 개정하고, 1004년 과거시행법을 정하는 등 자못 왕정체제의 확립을 꾀함이 있었으나, 시종 모후(母后) 천추 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 등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009년 정월 모후와 김치양이 그들의 소생을 왕위에 올리고자 태조의 손 (孫)으로서 유일하게 왕위계승 자격을 가진 대량원군(大良院君)을 해치려 는 움직임이 있자, 재신(宰臣) 최항(崔沆)·채충순(蔡忠順) 등에게 대량원 군을 자신의 후사로 영립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 巡檢使) 강조(康兆)에게 입위(入衛)를 명하였다. 대량원군의 영립은 마침내 성공하였으나, 그 자신은 도리어 김치양 일당을 제거한 강조에 의해 폐위당하여 태후와 함께 충주로 가던 중 적성(積城) 에서 강조가 보낸 사람들에 의하여 시해되었다. 목종은 어머니의 야욕때문에 정치에 신물이 났으며 그것을 동성연애쪽으로 활용한 왕이었다. 그의 파트너는 유치양과 유행간이라는 사람으로 이들은 목종을 믿고 정치를 함부로 휘둘렀고, 이는 신하들의 반발을 일으켰다고 보여진다.시호는 선녕(宣寧)·선양 (宣讓)이다. 목종은 유일하게 선정왕후 유씨만 부인으로 두었다. 이는 그가 동성연애자였기 때문이며, 또한 소생도 없었다.

현종


■ 출생과 성장
현종은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 소생인 아버지 안종 왕욱과 대종 왕욱의 딸 어머니 헌정왕후 황보씨 사이의 불륜의 관계에서 태어났다.목종이 병약하여,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후 황보씨와 김치양은 그들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현종 순을 죽기려고 애를 썼다. 그들에 의해 억지로 승려가 되어 숭교사(崇敎寺)와 신혈사(神穴寺)에 우거하다가 강조 (康兆)의 정변에 의하여 목종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 왕위등극
고려왕조가 성립 한 지 거의 1세기가 지난 시기에 왕위에 오른 현종은 고려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한 군주였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십훈요 十訓要] 등을 통하여 제시하였 던 국가의 기본방향이 성종대에 일단계 정비되고, 현종대에 비로소 기틀을 다지게 된다. 대내적으로는 호족세력에 의하여 형성된 정치체제를 청산하고, 국왕을 정점 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강력한 북진정책의 실천으로 북방민족에 대하여 자주적인 입장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현종대에 들어서면서 구체화되었던 동시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내적으로는 호족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책과 군현제의 완성이다. 1018년 5도양계체제(五道兩界體制), 즉 경(京)―목(牧)―도호(都護)―군(郡)―현(縣)―진(鎭)이라는 군현제의 기본 골격이 이때에 완성되었다. 이러한 군현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같은해 각 군현의 호장(戶長) 등 향리의 정원규정, 향리의 공복(公服)을 제정하였다. 1022년 향리들에 대한 호칭을 개정하여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대외적으로는 특히 태조 이래 북방외교의 현안문제였던 대거란(對契丹)관 계가 현종대에 이르러 비로소 해결을 보게 된다. 현종의 대거란정책은 거란 의 제2차침입(1010년)과 제3차침입(1018년)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제2차 침입은 강조의 정변에서 비롯되어 강조가 패배하자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 은 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다. 결국 거란은 현종의 입조(入朝)를 조건으로 철병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종은 이를 거부하였으므로 거란은 현종의 입조와 강동(江東)6주의 반란 을 요구하여 제3차침입을 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고려군과의 싸움에 연패하였고 퇴각하다 강감찬(姜邯贊)에 게 구주(龜州)에서 패하여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이듬해 거란과 강화하여 이후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게 된 뒤로, 고려는 13세기 중엽 몽고의 침입이 있을 때까지 약 2세기간 대외적으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 대장경 간행
비록 거란과의 충돌로 인한 외환이 있었으나 대내적으로는 덕종·정종조의 안정기를 오게 한 기틀이 마련된 시기로 특히 불력(佛力)으로 외침을 방어 하고자 하여 착수, 제작한 6,000여권의 대장경은 현종 때의 문화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많은 업적을 남긴 현종은1031년 5월 재위 22년 만에 40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능은 선릉(宣陵)으로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 곡령리 능현(陵峴)에 있으며, 시호는 원문(元文)이다 현종은 원정왕후 김씨를 비롯한 13명의 부인에게서 5남 8녀를 얻는다. 이중원성왕후 김시와 원혜왕후 김씨는 나중의 제9대 10대, 11대의 왕인 덕종, 정종, 문종을 낳았다.

덕종


■ 출생과 성장
이름은 흠(欽). 자는 원량(元良). 현종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이고, 비는 현종의 딸 경성왕후(敬成王后)와 효사왕후(孝思王后), 그리고 왕가도(王可道)의 딸 경목현비(敬穆賢妃)이다. 1016년 5월 을사일에 태어났다. 1020년(현종 11) 연경군(延慶君)에 봉해진 뒤 1022년 태자에 책봉되었고 1031년 중광전(重廣殿)에서 즉위하였다.


■ 왕위 등극
왕위에 오른 그는 먼저 선대 왕들에게 즉위를 고하고, 대사면령을 내려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며, 또한 각 지방에서 진상된 마을 대신들에게 나눠줌으로써 화합정치를 표방하였다. 처음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설치하고 육운십운시(六韻十韻詩)로 시험하여 합격자를 냈으며, 입춘 뒤의 벌목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1032년 거란의 사신이 내원성(來遠城)에 오자 받아들이지 않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삭주(朔州) ·영인진(寧仁鎭: 함경남도 영흥군)·파천(派川: 함경남도 안변군)에 성을 쌓았다. 이에 앞서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압록강의 성교(城橋)를 헐고 억류된 우리 사신의 송환을 청한 바 있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하정사(賀正使)의 파견을 중지하는 등 거란과의 관계가 미묘해졌다. 그해 왕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하던 것을 응천절(應天節)이라 고쳤다. 또, 왕가도를 감수국사(監修國史), 황주량(黃周亮)을 수국사(修國史)로 삼아 현종 때 착수한 국사편찬사업을 완성하였다. 1033년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로 하여금 압록강 어귀에서 서북면(西北面)의 위원(威遠: 평안북도 의주군)· 정주(靜州:同上)·운주(雲州: 평안북도 운산군)·안수(安水: 평안남도 개천군)·청새(淸塞: 평안북도 희천군) ·영원(寧遠)·맹주(孟州: 평안남도 맹산군)·삭주(朔州) 등의 13성(城)과 동북면(東北面)의 요덕(耀德: 함경남도 영흥군)·정변(靜邊: 同上)·화주(和州: 同上) 등의 3성을 연결하여 동해 도련포(都連浦)에 이르는 관성(關城)을 쌓게 하였는데, 1,000여리가 되는 석성(石城)으로 높이와 두께가 각각 25척이었다. 1034년 양반 및 군·한인(軍閑人)의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였다. 그해 병으로 아우 평양군(平壤君)에게 양위하였다. 시호는 경강(敬康)이다. 능은 숙릉(肅陵)으로 경기도 개성에 있다. 덕종은 경성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다섯 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제3비 경목현비에게서 1녀, 충주 유시에게서 1녀 등 2명의 공주를 얻었다.

정종


■ 출생과 성장
정종은 현종의 차남이자 원성왕후 김씨소생으로 1018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형(亨). 자는 신조(申照)이다. 비(妃)는 용신 왕후 한씨(容信王后韓氏)·용목왕후 이씨(容穆王后李氏)·용의왕후 한씨(容 懿王后韓氏)이다. 1022년(현종 13) 내사령 평양군(內史令平壤君)에 봉하여졌고, 1027년 개부의 동삼사 검교태사 겸 내사령(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兼內史令)이 되었으며, 1034년에 동복형인 덕종의 유명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그의 그의 나이 17세였다.


■ 왕위 등극
왕위에 오른 정종은 서경과 개경에 팔관회를 열어 대사면령을 내려 백관과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하였으며, 황주량, 최제안, 최충, 유지성 등을 각각 예부, 이부, 형부, 공부상서로 기용하여 조정을 개편하였다. 1035년 서북로(西北路)에 장성을 쌓아 변방의 수비를 강화하고, 현재의 평안북도 창성(昌城)에 성을 쌓아 창주(昌州)라 이름하고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다.
1036년 제위군(諸衛軍)에게 토지를 더 지급하여 변경의 방비를 굳게 하였으며,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을 수리하여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주었다.
1037년 압록강 일원에서 거란의 침입을 받고, 이듬해부터 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책봉을 받았으며, 이후 북방경비에 주력하여 1044년 덕종의 유업인 천리장성을 완성하였으니, 이는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都 連浦)에 이르는 것이었다.
1039년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제정하고, 1045년 악공(樂工)과 잡류(雜 類)들의 자손들이 과거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이듬해 장자상속법(長 子相續法)을 제정하였다.
1045년 비서성으로 하여금 《예기정의 禮記正義》·《모시정의 毛詩正義》 등을 간행하여 문신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고, 임진강에 부교(浮橋)를 놓게 하였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형·방(昉)·경(璥)·개이다.
그러나 1046년 초에 중병으로 두러눕고 말았다. 병이 위독하자 아우 휘(徽: 문종)로 하여금 국정을 맡게 하였다. 성격이 너그럽고 어질고 효우(孝友)한데다 학식과 도량이 크고 넓으며 영특하고 과감하였다. 거란과 다시 화친하여 나라가 태평하였으며 유명으로 능침을 검소하게 하였다.
능은 개성에 있는 주릉(周陵)이며, 시호는 용혜(容惠)이다.壤君)에게 양위하였다. 정종은 5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4남 1녀의 자녀를 얻엇다.
선대 왕들과 달리 5명의 부인이 모두 전혀 혈연관계가 없는 족외혼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5명의 부인 중 제1비 용산왕후 한씨가 1남을 낳았으며, 제2비 용의왕후 한씨가 애상군 방, 낙랑후 경, 개성후 개 등 세아들을 낳았고, 제3비 용목왕후 이씨가 도애공주를 낳았다.
이들 외에 제4비 용절덕비와 제5비 연창궁주 노씨는 소생이 없었다.

문종


■ 출생과 성장
문종은 현종의 셋째아들이자 운혜태후 김씨 소생으로 1019년 12월 계미일에 출생하였으며 이름은 휘(徽), 자는 촉유(燭幽)이다. 1022년에 낙랑군에 책봉되었고 1037년에 내사령에 올랐다가1046년 5월 정유일 정종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11대 왕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혈기왕성한 28세였다. 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문무의 재능을 겸비하고 사리에 밝아 주변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제10대왕 정종은 그의 형으로 정종에게 아들이 있었으나, 형제상속의 형태를 취하여 정종의 사후 왕위를 계승하였다.


■ 왕위 등극
역사는 그의 재위기간을 소위 고려의 문물제도가 크게 정비되어 흔히 이 시기를 고려의 황금기라고 한다. 불교·유교를 비롯해서 미술·공예에 이르기까지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발 전을 보았는데, 이것은 신라문화를 계승하는 동시에 송의 문화를 수용하여 독특한 창조적 고려문화를 형성한 것이었다.
문종의 치하에서 양반전시과(兩班田柴科)가 갱정(更定)되고 관제가 개편되며 백관의 반차(班次)와 녹과(祿科)가 제정되는 등 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정치·경제의 여러 제도가 완비되었다. 제도가 정비되는 과정에서는 송제(宋制)를 모방, 수용한 흔적도 많이 보이나, 대개의 경우 수 입된 제도는 고려의 실정에 알맞게 수정되어 실시되었다.
특히, 하부구조인 사회·경제의 상태는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으므로, 송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전시과제도와 같은 고려 독자의 토지법이 여러 번 개편되어 실시되었다.
지방통치체제도 성종 때 처음 외관(外官)이 설치된 이래 점차로 정비되어나갔는데, 현종을 거쳐 문종대에 이르러서는 양계(兩界)에 방어사·진사·진 장의 수가 늘어나고 남방의 제도(諸道)에서는 지주부군사(知州府郡事)· 현령(縣令)이 증설되어 수령의 관료제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제도의 완비는 물론 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과 불가분의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 문종의 치적
이는 그가 재위하고 있는 시기에 활동한 최제안이나 최충을 시중으로 앉히면서 그의 능력이 발휘되었다. 이시기가 태평성대라는 것은 그 시기에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그는 1년(1047) 시중 최충에 명하여 법률가들을 모아 종래의 율령(律令)·서산 (書算)에 대하여 상세한 고정(考定)을 가하였는데, 이 결과 고려의 형법(刑 法)이 크게 정비되었다.
3년(1049) 5품 이상의 고급관료들에게 상속이 가능한 일정한 토지를 지급하여 양반 신분의 유지에 필요한 재정적 후원을 목적으로 한 공음전시법(功 蔭田柴法)을 정하고, 4년(1050) 재면법(災免法)을 마련하였으며 또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보충하였다.
재면법은 농사의 피재액(被災額)에 따라서 피재액이 4분 이상일 경우 조(租)를 면하고, 6분인 경우 조· 포(布)를 면하고, 7분인 경우 조·포·역(役)을 모두 다 면제해주는 법제였다.
답험손실법은 현지의 농사상황을 관(官)에서 잘 조사한 결과 피해의 정도에 따라서 조세를 경감, 조절해주었다.
16년(1062) 삼원신수법(三員訊囚法)을 마련해서 죄수의 신문(訊問)에는 반드시 형관(刑官) 3명 이상을 입회하게 하여 범죄의 조사가 공정히 이루어지도록 하였고, 17년(1063) 국자감 제생(諸生)의 고교법(考校法)을 제정하여 학생의 재학연한을 제한하였다.
이에 따라 유생(儒生)의 재학기간은 9년, 율생(律生)의 재학기간은 6년으로 제한해서, 자질이 부족하여 재학 기간중 학업의 성적을 올리지 못하는 자는 퇴학시켰다.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이 규정되어 결(結)의 면적이 확정된 것도 문종 23 년(1069)의 일이다.
이에 의하면 양전(量田)의 단위는 보(步)로써 정하되 6촌(寸)을 1분(分), 10 분을 1척(尺), 6척을 1보로 하고 방(方)33보를 1결, 방 47보를 2결로 하여 이하 10결에 이르기까지 그 면적을 명시한 것이다. 이 양전척(量田尺)의 실체는 알 수 없으나 고주척(古周尺, 19.8㎝)은 아닌 듯하며, 이 양전척에 의하여 산정되는 결의 면적은 약 1만7천평(坪)·6, 800 평·4, 500평 등으로 추정하는 견해들이 서로 대립되어 있다.
이해 또 종래 1결에 대하여 5승(升)을 징수하던 전세(田稅)가 7승(升) 5홉(合)으로, 10부 (負)에 대해서는 7홉5작(勺)으로 각각 인상되었다. 고려의 전품(田品)에 관해서는 문종 8년(1054) 해마다 경작하는 불역지지 (不易之地)를 상전(上田)으로 하고, 1년 쉬고 1년 경작하는 일역지지(一易 之地)를 중전(中田)으로 하고, 2년 쉬고 1년 경작하는 재역지지(再易之地)를 하전(下田)으로 하는 3등급의 전품제(田品制)가 마련되어 있었다.
양반전시과가 개정되어 고려 전기의 토지법이 최종적으로 완비되고 또 녹봉제도가 문·무 백관 및 유역인(有役人)들에게 실시되는 것도 문종 30년 (1076)의 일인데, 이것은 모두 집권적 지배체제의 물질적 토대가 정비되어 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향리의 자제를 인질로 서울에 보내어 출신지방의 계문(啓聞)에 대비한 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이 제정된 것은 이듬해의 일인데, 이것도 물론 집권 적 지배체제의 강화·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종의 치하에서 또 주목되는 것은 23년(1069) 경기의 범위가 확대되어 종전의 13현이 4배로 늘어나 50여현으로 팽창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경기의 확대는 종래 양반전시과의 개편을 앞두고 양반의 전시지(田柴地)를 왕경의 주변인 경기의 땅 안에서 확정 지급하기 위한 조처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해석되어왔는데, 현재로서는 양반에 지급된 과전(科田)은 경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하도(下道)전역에 걸쳐 지급되었으리라는 견해가 유력시되어 있으므로, 경기확대의 이유와 동기는 앞으로 다른 각도에서 재검토되어야 할 필 요가 있다.
또, 남반직(南班職)의 최고위가 종래의 4품위(品位)에서 7품위로 떨어져 격하된 것도 문종대의 일인데, 이것은 문무 양반에 비하여 남반이 천시된 결과이며 양반관료의 신분의 우월성이 정착된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대외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4년·6년·18년·22년·27년에 각각 변방에서 동여진(東女眞)의 침구를 보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대여진관계는 대체로 평온하여 여진측이 토산을 바쳐 내부(內附)하였으므로 후일에 보는 큰 변동은 아직 예측되지 않았다.
문종은 고려 전기의 문물제도가 완비되는 문화적 황금기를 상징하는 영매한 국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태평시기를 이끈 문종도 1082년 인절현비 이씨가 죽고, 이듬해 4월 아홉번째 왕자 왕침이 죽고 난 다음 실의에 빠진 문종도 갑자기 병상에 누웠다.
그리고 5월부터 일어나지 못하다가 7월에 태자 훈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생을 마감하였다.
이때 향년 65세로 재위 37년이었다. 문종은 인평왕후 김씨, 인예왕후 이씨, 인경현비 이씨, 인절현비 이씨, 인목덕비 김씨 등 5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이들 부인들 중 인평과 인목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모두 이자연의 딸이다.

순종


■ 출생과 성장
순종은 문종의 장남이자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소생으로 1047년 12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휴(烋), 이름은 훈(勳). 자는 의공(義恭)이다.
8세 때인 1053년 2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1083년 7월 문종이 죽자 37세의 나이로 고려 제 12대 왕으로 올랐다.
그는 문종이 죽자 등극하였지만 원래 병약한 몸으로 즉위 3개월만에 임종을 하게 되어 고려 국왕중에 가장 짧은 재위기간의 왕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질환 이 있는데다가 여막에서 슬퍼한 나머지 쇠약해져 3개월 만에 죽었다.
시호는 선혜(宣惠)이며, 능은 성릉(成陵)으로 개성에 있다.
순종은 세 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자식을 얻지는 못하였다.
제 1비는 평양공 기(平壤公基)의 딸 정의왕후(貞懿王后)왕씨이며, 제 2비는 김양검(金良儉)의 딸 선희왕후(宣禧王后)김씨이며, 제 3비는 이호(李顥)의 딸 장경궁주(長慶宮主)이씨이다.

선종


■ 출생과 성장
선종은 문종의 둘째아들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1049년 9월 경자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운(運), 자는 계천(繼天)이다.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밝고 제술(製述)에 뛰어나 1056년 3월 국원후에 책봉된 이래 여러관직을 거쳐 상서령으로 있다가 1083년 7월 순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태사 겸 중서령으로 임명되었다.


■ 왕위 등극
그리고 그해 10월에 순종이 재위 3개월만에 죽자 고려 제 13대 왕에 올랐다. 선종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자라서는 효도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나 놀이에 절도가 없고, 사탑(寺塔)을 많이 세워 백성들이 과중한 노역에 대하여 원망이 많았다고 한다.


■ 정치적 성향
선종시대의 정치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로 매우 안정되었으며, 외교에서도 거란을 포함한 송, 일본, 여진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추진하며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1084년(선종 1) 승과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변경을 지키는 사졸들에게 저고리와 바지를 하사하였다. 1085년 왕의 아우 의천(義天)이 몰래 송나라에 들어가 2년 동안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오니 그 환영의식이 성대하였다. 의천은 불경과 경서 1,000권을 바쳤고,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으며, 송·요·일본 등지에서 서적을 사들이니 거의 4, 000여권에 달하였는데 모두 간행하게 하였다. 1089년 회경전(會慶殿)에 13층 금탑(金塔)을 세우고, 인예왕후(仁睿王后)의 청에 따라 천태종(天台宗) 의 중심사찰인 국청사(國淸寺)를 짓게 하였다. 1091년 예부의 주장으로 국학(國學)에 72현(공자의 제자인 顔回 등 72인)의 상을 벽에 그려 붙였는데, 그 차례는 송나라 국자감의 예를 따르고, 그 복장은 10철(十哲)을 모방하게 하였다 그는 시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감성이 풍부하여 많은 시를 남겼다. 1092년 병이 들어 의원이 처방한 약을 먹고 문득 시를 지었는데 “약효가 있고 없음이야 무엇을 염려하랴. 덧없는 인생 시작이 있었으니 어찌 끝이 없으리. 오직 원하는 것은 여러가지 선행을 닦아 청청한 곳에 올라 부처에게 예를 드림이네.”라는 구절이 있어 사람들이 놀라고 안쓰럽게 여겼다. 1094년 2월 열병(閱兵)하고, 재위 10년7개월만에 향년 46세로 숨을 거두었다. 능은 개성에 있는 인릉(仁陵)이며, 시호는 사효(思孝)이다. 선종은 3명의 부인에게서 4남 3녀를 얻었다. 제1비 정신현비가 1녀 제2비 사숙왕후가 헌종을 비롯 1남 2녀, 제3비 원신궁주가 3남을 낳았다.

헌종


■ 출생과 성장
헌종은 선종의 장남이자 제2비 사숙왕후 소생으로 1084년 6월 을미일에 태어났으며,이름은 욱(昱)이다. 1094년 5월 선종이 서거하자 그 유언에 따라 중관전에서 11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제14대왕에 올랐다. 선종의 사망시 나이가 11세였던 헌종은 유아시절부터 당뇨병에 시달려 매우 병약했으며,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 처지였다. 이때문에 대부분의 대신들은 왕권이 선종의 동생들 중에 한명에게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다.즉위 초에는 어리고 병약하였으므로 태후가 청정(聽政)하여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모두 처결하였다. 1095년(헌종 1) 정월 초하루에 해 옆에 혜성(慧星)이 나타났는데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해의 곁에 혜성이 있음은 근신(近臣)의 난이 있을 징조이니, 제후 중에 반(反)하려는 자가 있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타고난 천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지만 나이가 어려 수성(修省)할 줄 모르고, 다만 내의(內醫) 3, 4명을 불러들여 방서(方書)를 토론하고, 혹은 서화를 익힐 뿐이었다. 같은해 7월에 과연 이자의(李資義)가 반란을 꾀하였으나, 오히려 주살되고 난은 진압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선종은 총명한 아우가 5명이나 있었는데도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였으므로 이런 반란이 일어났다.”고 애석해 하였다. 난적(亂賊)을 토벌한 공으로 소태보(邵台輔)는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 왕국모(王國#모42)는 권판병부사(權判兵部事)가 되었다. 같은해 8월에 계림공 희(鷄林公熙:뒤의 숙종)가 중서령으로 임명되더니 그해 10월에 어린 조카를 폐하고 왕위에 올랐다. 헌종이 제서(制書)를 내려 선위(禪位)할 때 근신 김덕균(金德均)을 보내어 계림공 희를 종저(宗邸)에서 맞이하고, 자신은 후궁으로 물러났다. 왕위를 물러난 헌종은 1097년 2월 흥성궁에서 14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병명은 당뇨병이었지만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왕위를 찬탈한 숙종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시호는 회상(懷觴), 예종 때 공상(恭觴)으로 바꾸었다. 능은 개성에 있는 온릉(穩陵)이다.

숙종


■ 출생과 성장
숙종은 문종의 셋째아들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순종, 선종의 동복아우다. 105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희(熙), 이름은 옹, 자는 천상(天常)이다.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과단성이 있고, 오경(五經)·제자서(諸子書)·사서(史 書) 등에 해박하였다. 문종의 큰 기대를 받아 [뒷날에 왕실을 부흥시킬 자는 너다.]라고 하여 문종 때 계림공에 봉하여졌으며, 선종3년(1086)에는 수태보 벼슬을 받았다.
1094년 조카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태사 겸 상서령에 올랐다.


■ 왕위 등극
숙종은 1094년 10월 측근세력이 전혀 없는 어린 헌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고려 제15대왕에 올랐다.
이때의 그의 나이42세였다.
숙종은 왕권을 장악하자 곧 반대세력을 완전히 숙청하고, 왕위에 오르던 날에도 이자의의 누이동생 원신궁주 이씨와 그녀의 아들 한산후 그리고 나머지 두 아들까지 모두 경원군으로 귀양을 보냈다.
1096년 6촌 이내의 혼인을 금하였으나 백성들이나 귀족들에게 별로 지켜지지 못했다.
1097년에는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화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1101년에는 본국의 지형을 본떠서 은병[闊口〕을 주조하고 이듬해에는 고주법(鼓鑄法:돈 만드는 법)을 제정하여 해동통보(海東通寶) 1만5000관을 만들어 문무양반과 군인들에게 분배하였다. 1099년 김위제의 주장에 따라 남경을 중시하고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 을 두어 궁궐을 조영하게 하였다.
1102년에 예부에서 (우리나라가 예의로 교화하기는 기자(箕子)로부터 비롯 되었으니, 원컨대 그 분묘를 찾고, 사당을 세워 제사하십시오.)라고 아뢰니 이에 따라 서경에 기자사(箕子祠)를 세웠다.
1103년 동여진의 추장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였으나, 추장이 되면서 고려에 침입하였다. 같은해 2월에 임간(林幹)이 정주에서 패하였고, 3월에는 윤관(尹瓘)이 여진정벌을 꾀하였으나, 역시 이기지 못하고 화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따라 윤관의 주장으로 별무반(別武班)을 처음 설치하였다.
윤관은 (신이 여진에게 패한 것은 저들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므로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아뢰니 드디어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神騎 軍),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神步軍), 승도(僧徒)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 軍)을 두어 별무반이라 칭하고, 여진정벌을 준비하게 하였다.
1105년 서경에 순행하여 동명왕묘(東明王廟)에 제사하고, 병이 들어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10월에 수레 안에서 죽으니 태자[우]가 유조를 받들어 즉위하였다.
능은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판문리에 있는 영릉(英陵)이며, 시호는 명효(明孝)이다.
숙종의 부인은 명의왕후 유씨 1명이었으며, 그녀에게서 예종을 비롯한 7남4녀가 태어났다.

예종


■ 출생과 성장
예종은 숙종과 명의왕후 유씨의 맏아들로서 1079년 정월 정축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우. 자는 세민(世民)이다.
일찍부터 뜻이 깊고 침착하여 도량이 넓었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1094년에 검교사공 주국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벼슬을 받았으며, 여러번 승진하여 태위에 올랐다가 아버지 숙종이 왕위에 오른지 5년만인 1100년에 왕태자에 책봉되었다.


■ 왕위 등극
숙종이 동명성왕능에 참배갔다 오다가 죽음을 맞이한 후 제16대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17세이였다. 예종은 즉위 후 한달여만에 조정을 개편하였는데 그 이유는 여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였다.
여진이 추장 아골타의 영도 아래 급속하게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부왕인 숙종의 여진정벌에 대한 서소(誓疏:맹세하는 축원문)를 간직하고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신기군을 사열하는 등 여진정벌에 힘써 1107년(예종 2) 에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 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쳐서 대파하고 이듬 해에는 함흥평야 일대에 9성(城)을 설치하게 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여진족의 침입, 9성방비의 어려움, 또 윤관의 공을 시기하는 자들의 책동으로 1년 만에 9성을 철폐하고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1109년 국학(國學)에 학과별 전문강좌인 칠재(七齋)를 설치하여 관학(官學)의 진흥을 꾀하였다.
1112년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여 빈민들의 시약을 담당하게 하였고, 이 듬해에는 예의상정소(禮儀詳定所)를 설치하였다.
1115년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골타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황제라 일컫고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칭하자, 요(遼)나라에서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려에 원병을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렇듯 중립정책으로 변방을 안정시키고 동시에 영토확장의 행운도 얻은 예종은 변방의 안정을 꾀하면서도 꾸준히 문화정책과 민심안정책을 실시했다.
1116년 청연각과 보문각(寶文閣)을 짓고 학사(學士)를 두어 경적(經籍)을 토론하게 함으로써 유학을 크게 일으켰으며, 송나라에서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왔는데, 이것이 아악(雅樂)이라는 궁중음악이다.
1117년 금나라에서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는 글로써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의 반대로 회답하지 않았다.
1119년 양현고(養賢庫)라는 장학재단을 국학에 설립하였다. 이때 유사(有司) 에게 명하여 학사(學舍)를 널리 설치하고, 국학 칠재의 정원을 유학 60인과 무학 17인으로 하며, 명유를 뽑아 학관(學官)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니 문풍이 크게 진작되었다.
1120년 팔관회를 열고 태조의 공신인 신숭겸(申崇謙)·김락(金樂)을 추도하여 도이장가를 지었다.
1122년 3월에 그의 등에 자그마한 종기가 하나 발견되는데, 그후로 병상에 눕더니 한달만에 4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으니, 재위17년 만의 일이었다.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 (裕陵)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예종은 경화왕후 이씨, 순덕왕후 이씨, 문정왕후 왕씨, 숙비 최씨 등 4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제2비 문경왕후에게서 인종과 승덕, 흥경 두 공주를 얻었다.

인종


■ 출생과 성장
인종은 예종의 맏아들이자 순덕왕후 이씨 소생으로 1109년 10월 기해일에 태어났으며,이름은 해(楷), 초명은 구(構), 자는 인표(仁表)이다. 그는 1115년 2월 7세의 나이로 왕태자에 책봉되었다. 성품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너그럽고 자비로웠다고 하며. 또, 학문을 좋아하고 스승과 벗에 대한 예가 밝았다고 한다.


■ 왕위 등극
1122년 4월 예종이 죽자 이자겸 등에 의해 14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인종은 역사가들에게 두가지 다른 평가를 듣기도 하는데 인을 갖춘 왕이라고 하는 평가와, 우유부단한 왕으로 평가 받기도 한다.
김부식은 앞의 평가를 내려 그에게 어질인자를 붙여 묘호를 인종이라 하였다. 1123년 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 학식(學式)을 만들게 하였는데, 국자학(國子學)은 3품 이상, 태학(太學)은 5품 이상, 사문학(四門學)은 7품 이상의 자손을 입학하게 하였다.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이면서 장인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자겸은 막대한 권력을 휘둘렸으며 이에 만족하지 않고 왕위자리까지 넘보다 난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이자겸의 난이다. 1126년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자 최사전(崔思全)과 척준경(拓俊京)을 시켜 난을 진압하고, 이자겸을 잡아 영광으로 유배시켰다.
1127년 이자겸의 난을 진압한 척준경을 정지상이 탄핵하여 유배하고, 중외(中外)에 조서(詔書)를 발표하여 각 지방의 주현에 향학을 세워 지방자제들의 교육을 진작시켰다.
1128년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 정지상(鄭知常) 등이 주장한 서경길지설(西京吉地說)에 공감하여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에 대화궐(大華闕)을 짓고 수시로 서경을 순행하였다. 1129년 서적소(書籍所)를 설치하여 정치하는 여가에 여러 학사들과 학문을 탐구하고 서적을 강독하게 하였다.
1131년 서경의 대화궁에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하여 여러 부처와 명산의 신(神)을 제사하게 함으로써 서경천도론이 크게 일어났다. 1133년 무학재(武學齋)를 폐지함으로써 무예로 선비를 뽑는 일은 없어졌다. 1135년 묘청·정지상·백수한 등이 서경천도론·금국정벌론·칭제건원론 등을 내세웠으나, 김부식(金富軾) 등에 의해 좌절됨에 따라 묘청의 난이 일어나니 김부식을 서경정토원수(西京征討元帥)로 삼아 난을 평정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편찬
1145년 김부식 등에게 관찬사서인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하였는데 이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史記》를 모방한 기전체(紀傳體)로 50권이나 되는 방대한 것이었다.
인종은 정국의 어려움으로 많은 고초를 겪다가 1146년 2월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3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능은 개성에 있는 장릉(長陵)이며, 시호는 효공(孝恭)이다.
인종은 이자겸의 딸인 두명의 폐비와 공예왕후 임씨, 선평왕후 김씨 등 4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제3비 공예왕후 임씨에게서 의종, 명종, 신종을 비롯한 대녕후 경, 원경국사 충희 등 다섯아들과 승경, 덕녕, 창락, 영화 네 명의 공주를 얻었다.

의종


■ 출생과 성장
의종은 인종의 맏아들이자 제2비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27년 경오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현(晛), 초명은 철(徹). 자는 일승(日升)이다.
의종은 어린 시절부터 오락을 좋아하고 시를 즐겼다.
특히 격구에 몰입하여 학문을 소홀히 하고, 내시나 무장들과 어울려 함께 시합을 하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어머니 공예왕후 임씨는 둘째왕자 경을 태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1134년(인종 12)에 태자가 되었으며 1146년 인종이 죽자 그의 유언대로 대관전에서 고려 18대왕에 올랐다. 그의 나이 20세였다.


■ 왕위 등극
의종은 즉위 때부터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고려왕실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어 있었다.
이미 인종 때에 이자겸(李資謙)의 전횡과 반란 등으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할 겨를도 없이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남으로써 왕권은 더욱 쇠약해졌다.
묘청의 난 진압에 따르는 서경세력(西京勢力)의 몰락은 개경(開京)에 기반을 둔 문신세력(文臣勢力)을 득세하게 하였다.
서경세력의 몰락은 고려왕실의 유력한 세력기반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려왕실로서는 왕실의 권위회복과 왕권의 안정이 절실한 과제였다.
그러나 부왕인 인종이 해결하지 못한 난제(難題)를 어린 의종이 감당할 수는 없었다.
의종은 즉위초부터 개경 문신세력의 심한 제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왕위를 엿보는 반역음모로 항상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고 있었다. 의종은 재위중 거동이 잦았다.
그 이유를 이제까지 대체로 놀이를 좋아하는 그의 타고난 성격 탓으로 돌리고 있으나,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절박한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한 것이 그 주된 이유로 생각된다.
게다가, 당시 국제관계의 전개도 고려측에 유리하지 않았다.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가 인종 때보다 훨씬 더 강해져서 대륙 지배세력으로서의 지위를 굳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종 때에는 고려왕실의 국내적 지위는 물론 국제적 지위도 크게 위축되었던 것이다. 의종은 그 타고난 성격이 나약하고 섬세하였으나, 무능하지는 않았다. 그는 격구(擊毬)와 음률(音律)에 능하였으며, 특히 시문(詩文)에는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성격과 재능은 어려운 시기의 군주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즉위한 뒤에 그가 해결하여야 할 당면과제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생각하고, 또 이를 실현해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또 왕조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1148년에 현릉(顯陵:太祖陵)과 창릉(昌陵:世祖陵) 등을 참배하였으며, 1154년 서경에 중흥사(重興寺)를, 1158년 백주(白州)에 별궁(別宮)을 창건하여 그 명칭을 친히 중흥(重興)이라 지은 데에서도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1170년에는 서경에 거동하여 신령(新令)을 반포하였다. 그는 장차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정하여 다시 왕화(王化)를 부흥하고자 하여 고성(古聖)이 권계(勸戒)한 유훈(遺訓)과 현재 민폐를 구제할 일을 채택하여 신령을 반포한다고 다짐하였다. 그 전에 그 주체적인 내용을 보면 유교적 정치이념에 대하여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불교·음양설·선풍(仙 風)을 중요시하였을 뿐이다.
이것은 의종이 실제정치에 있어서는 유교적인 가치관을 의식적으로 외면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마도 유교적 지식인이었던 문신에 대한 정치적 반감이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평소에 인정(人 情)과 태평(太平) 등에 관한 생각과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여보면, 의종은 당시 매우 어려운 상황속에서 왕조의 중흥과 좋은 정치의 실현을 염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실제 정치면에 구체적인 성과로써 나타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재위중 왕권능멸의 풍조와 신변의 위협으로 시달림을 받았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나 여러 신(神)들에게 의존하거나 각 처로 옮겨다니며 놀이로써 시름을 잊거나, 문신들에게 자기과시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가 처하여 있던 시대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그것이 의종대의 왕권이 가진 한계성이었다. 의종의 행적을 보면, 그가 재위중에 유흥과 오락생활에 깊이 빠지고, 또 지나치게 불법을 숭상하고 신지(神祗)를 존신(尊信)하는 등으로 많은 폐단을 초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원인을 의종 개인의 방종경박한 성격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의종의 행동이 그렇게밖에 나타날 수 없었던 요인에 주목하여야 한다.
의종대의 왕권과 문신세력의 대립·갈등 은 정치적·사회적 혼돈을 초래하였고, 그것이 무신정변(武臣政變)의 계기가 되었다.
1170년 의종이 보현원(普賢院)에 거동하였을 때에 정중부(鄭仲夫) ·이의방 (李義方)·이고(李高) 등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킴으로써 그는 왕위에서 물러나 거제현(巨濟縣)으로 옮겨갔다.이것이 바로 정중부의 난이다.
이와 동시에 그의 아우인 익양공 호(翼陽公晧)가 즉위하니, 그가 곧 명종이다.
이후 무신시대가 열리고, 고려사회는 새로운 변혁기로 접어든다.
무신시대는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일가로 이어져 명종대에서 고종대까지 1백년이나 지속된다. 그뒤 1173년(명종 3)에 김보당(金甫當)이 무신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의종을 받들어 계림(鷄林:慶州)에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김보당의 거병이 실패하자, 의종은 무신정권이 보낸 장군 이의민 (李義旼)에 의하여 비참하게 살해되어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에 던져졌다.
이때가 1173년 10월이며 향년 47세였다. 묘효(廟號)는 의종(毅宗), 능은 희릉(禧陵)이며, 시호는 장효(莊孝)이다.
강릉공온(江陵公溫)의 딸인 장경왕후(莊敬王后)김씨와 참정(參政)을 지낸 최단(崔端)의 딸 장선왕후(莊宣王后)최씨 두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장경왕후 김씨에게서 1남3녀를 얻었다.

명종


■ 출생과 성장
명종은 인종의 셋째아들이자 공예왕후 임씨의 소생으로 이름은 호(晧). 초명은 흔(昕), 자는 지단(之旦)이다. 1148년(의종 2)에 익양후(翼陽侯)가 되었다가 후에 다시 익양공으로 승진되었으며1170년에 정중부(鄭仲夫)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추대하여 고려 19대왕으로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 왕위 등극
의종은 즉위하고 나서 곧 허수아비에 불과한 왕이 되는 처지에 놓였다.
모든 권력은 난을 일으킨 무신들이 쥐고 있었고, 명종은 그들 무신의 권력싸움의 틈바구니에 끼어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빳다.
그만큼 그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이였다. 즉위하자마자 수문전(修文殿)에 나아가 정중부를 참지정사(參知政事), 이고(李高)를 대장군· 위위경(衛尉卿), 이의방(李義方)을 대장군·전중감(殿中監)에 임명하는 등 자격과 서열을 무시하고, 또 문관직과 무관직에 관계없이 정중부 일파가 바라는 대로 관직을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왕은 허수아비가 되고 실권은 무신에게 돌아갔다.
1171년(명종 1)에 이고가 반란을 도모하므로 그와 그 일당을 주살하였다. 그해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와 경상·진합주도(慶尙晉陜州道)를 각각 2도로 구분하였으며, 왕의 생일을 건흥절(乾興節)로 정하였다.
1173년에 원자(元子) 도(璹:후에 康宗)를 세워 태자를 삼고 56현에 각각 감무(監務)를 두었다. 그해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이 정중부와 이의방의 타도와 전왕인 의종의 복위를 위하여 동계(東界)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정중부와 이의방 등에 의하여 평정되고 의종은 경주에서 이의민(李義旼)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또, 그해 3경(京)·4대도호부(大都護府)·8목(牧)으로부터 군(郡)·현(縣)·역(驛)·관(館)에 이르기까지 무인의 등용을 허락했으며, 이때부터 지방관까지도 무신이 장악하게 되었다.
1174년에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에 의하여 좌소 백악산(左蘇白岳山)과 우소 백마산(右蘇白馬山)·북소 기달산(北蘇箕達山)에 연기궁궐(延基宮闕)을 두기로 하고 그 조성관(造成官)을 두었다. 그해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와 이의방의 타도를 위하여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윤인첨(尹麟瞻)을 원수(元帥), 기탁성(奇卓誠)을 부원수로 삼아 서경을 치게 하여 2년 만에 평정하였다.
1175년에 영양 등 10현에 감무를 두었으며, 1178년에 찰방사(察訪使)를 각 도에 파견하여 백성들의 고통과 지방관들의 근태를 살피게 하였다.
또한, 연등회를 1월 15일에 행하던 것을 옛 제도에 의하여 2월 15일로 환원하였다. 1188년에 양계 병마사와 오도안찰사로 하여금 지방을 순찰하여 지방관들의 청렴과 탐학, 근면과 태만을 살피게 하였다.
1190년에 수태사(守太師)이하 백관 의종(儀從)의 구사(丘史)의 원수(員數)를 정하였다.
1192년에 공사의 연회에 유밀과(油蜜果)의 사용을 금하였는데 그것은 유밀이 귀해졌기 때문이었다.
1195년에 오래 묵은 빚인 숙채(宿債)를 면하게 하여 빚에 시달리는 민생의 괴로움을 덜어주려 하였고, 상주에 공검 대제(恭儉大堤)를 축조하여 권농에 힘쓰기도 하였다.
1196년에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뒤 정치의 쇄신과 중흥을 목표로 하는 내용의 봉사십조(封事十條)를 올리므로 이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1197년에 최충헌 형제에게 폐위를 당하고 아우인 평량공(平凉公) 민(旼)이 대신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허수아비왕 명종은 27년간 머물렀던 왕위에서 쫓겨나 창락궁에 연금되었다.
그후 6년을 더 살다가 1202년 9월 이질에 걸려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시호는 광효(光孝)이며, 능은 지릉(知陵)이다. 명종은 강릉공 김온의 딸인 의정왕후 김씨에게서 강종과 연희, 수안 두 공주를 얻었으며, 의정왕후는 아들 강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광정태후로 추존되었다.
또한,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여러 명의 후궁에게서 십 여명의 아들을 낳았다.

신종


■ 출생과 성장
신종은 인종의 다섯째아들이자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4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탁(晫), 초명은 민(旼), 자는 지화(至華)이다.
평량공(平凉公)에 봉해진 뒤 최충헌(崔忠獻)형제가 명종을 폐하고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의 제 20대왕으로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1198년(신종 1)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두었고, 관서(關西)민가의 안대(방앗간을 차림.)를 금하였다.
그해 사노(私奴) 만적(萬積)의 난이 일어난 것을 비롯하여 이듬해에는 명주(溟州:지금의 江陵)· 동경(東京:지금의 慶州), 뒤이어 진주(晉州)·전주·합주(陜州:지금의 陜川) 등지에서 민란이 계속 일어났다.
신종은 즉위하였지만 이름뿐인 왕이였다. 조정 대소사의 모든 결정권은 최충헌을 비롯한 그의 측근들이 다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1199년에 최충헌이 문무관의 전주(銓注-人事行政)를 도맡아 행하였는데, 이로부터 모든 실권은 최충헌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해 수양장도감 (輸養帳都監)과 오가도감(五家都監)을 두었다.
1202년에 탐라(耽羅-지금의 濟州道)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소부소감(少府少監) 장윤문(張允文)과 중랑장(中郎將) 이당적(李唐積)을 안무사(安撫使)로 보내어 평정하였다.
신종은 이러한 비참한 상태로 왕위를 유지하다가 1203년 12월 등창이 심하여 병석에 누워 이듬해 1월 태자 덕에게 선위하고 둘째 아들 덕양후의 저택에서 6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며, 능은 양릉(陽陵)이다. 신종은 강릉공 김온의 딸인 선정왕후 김씨에게서 희종, 양양공 서, 효회, 경녕공주 등 2남2녀를 얻었다.

희종


■ 출생과 성장
희종은 신종과 선정왕후의 맏아들로 1181년 5월에 태어났으며,이름은 영, 초명은 덕(悳). 자는 불피(不陂).이다.
1200년(신종 3)에 태자로 책봉되고 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대관전 (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희종은 신종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왕권은 없었으며, 국사 전반에 관한 모든 결정은 최충헌에 의해서 이뤄졌다.
1205년(희종 1)에 최충헌(崔忠獻)을 진강군개국후(晋康郡開國侯)에 봉하였으며 1206년에 다시 진강후(晋康侯)에 봉하고 흥녕부(興寧府)를 세우게 하였다.
1207년 최충헌의 청으로 유배자 300여명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 방면하였다.
1208년 개성 대시(大市) 좌우의 긴 행랑(行廊) 1,080영(楹)을 다시 짓게 하였는데 오부방리(五部坊里)와 양반의 집에서 미속(米粟)을 내게 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1209년 4월에는 청교역리 3명이 최중헌 부자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가 귀법사 승려의 고발로 실패했다.
이 사건당시 범인의 색출을 위하여 임시로 설치된 교정도감은 그 후부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기관으로 자리잡는다.
무신들의 합좌기구인 중방은 이 순간부터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략했다.
희종은 신종과는 달리 부왕의 선위를 받아 왕실의 예법에 따라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측면에서 즉위에 대한 대의 명분이 확실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왕권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최충헌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당시 정권을 휘두르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도리어 최충헌에게 폐위를 당하여 강화로 쫓겨났다. 이때 희종의 나이 혈기왕성한 31세였으며, 재위 7년 11개월이었다.
뒤이어 자란도(紫鸞島)로 옮겨졌고, 1215년(고종 2) 다시 교동으로 옮겨졌다 가 1219년 서울에 봉영(奉迎)되었다.
이렇게 서울에 돌아와서 딸 덕창궁주 (德昌宮主)를 최충헌의 아들 성(珹)과 혼인시켰다.
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최우(崔瑀)에 의하여 다시 강화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져 1237년에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죽었다.
묘호는 처음에 정종이었으나 뒤에 희종으로 고쳤다. 강화에 장사하여 능을 석릉(碩陵)이라 하였다.
시호는 성효(誠孝)이다 희종은 성평왕후 임씨에게서 창원공 지, 시녕후 위, 경원공 조, 대선사 경지, 충명국사 각응 등 다섯아들과 안혜태후, 영창, 덕창, 가순, 정희 등 다섯명의 딸을 얻었다.

강종


■ 출생과 성장
강종은 명종의 맏아들이자 의정왕후 김씨 소생으로 1152년 4월 을사일에 태어났으며, 초명은숙(璹)개명은 정(貞) 이름은 오, 자는 대화(大華)이다.
1171년(명종 1)관례를 올리고, 1173년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1197년 부왕과 함께 최충헌(崔忠獻)에게 쫓기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1210년(희종 6)에 소환되어 이듬해 수사공 상주국 한남공(守司空上柱國漢南公)에 책봉되었다. 같은해 12월 최충헌에게 옹립되어 폐위된 희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때의 그의 나이 60세였다. 강종은 어린 시절부터 무신정권의 틈바구니 속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지냈으며 급기야 무신들에 의해 부왕 명종이 강제로 퇴위당함에 따라 14년 동안 강화도에서 유배 생활을 해야했다.


■ 왕위 등극
강종이 60세의 나이로 22대 왕으로 즉위는 하였지만 최씨 무단정치로 실권이 없었다.
그는 최충헌이 머무르던 흥녕부를 진강부로 고치고 그에게 문경무위향리조안공신의 칭호를 주었으며, 국사 전반에 관한 모든 업무를 최충헌이 별감으로 있던 교정도감에 일임하였다.
왕의 생일을 광천절(光天節)이라 정하고, 왕모 의정왕후 김씨(懿靖王后金氏)를 광정태후로 추존하였다.
또한, 원자 진(瞋:뒤의 高宗)을 태자에 책봉하고, 왕비 유씨를 연덕궁주(延德宮主)로 하였다. 그 후 1213년 8월 지병으로 병상에 누웠으며, 그 달 정축일에 태자 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시호는 원효(元孝)이며, 장지는 후릉(厚陵:개풍군 현화리)이다.
강종은 이의방의 딸인 사평왕후 이씨와 종실 신안후 성의 딸인 원덕왕후 유씨 두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고종과 수녕궁주를 얻었다.

고종


■ 출생과 성장
고종은 강종의 맏아들이자 원덕왕후 유씨 소생으로 1192년 정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철, 초명은 진, 자는 대명(大命)이다. 그는 부왕 강종이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안악현에 유배되었으며, 강종 즉위 이듬해인 1212년(강종 1) 태자에 책봉되어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때의 그의 나이 22세였다.


■ 왕위 등극
46년의 재위기간 대부분은 최씨(崔氏)의 독재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였으며, 잦은 민란과, 거란과 몽고의 침입에 대한 항쟁 등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어야 했다.
고종이 즉위하던 시기에 중국에서는 몽고가 일어나 금에 쫓겨 서쪽으로 도망갔던 거란을 다시 동쪽으로 내몰았다.
이 바람에 금은 변방지역에 밀려든 거란족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했고, 내부적으로 선무포선 만고가 반란을 일으켜 요동을 차지하고 천황을 자칭하며 진을 세울 정도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1218년, 당시의 최고실력자 최충헌(崔忠獻)이 70세로 치사하려고 하자 궤장을 주어 계속 정사를 돌보게 하였으며, 이듬해 왕씨(王氏)의 성까지 주었다.
같은해 최충헌이 궤장과 사성을 반납하고 죽자, 그의 아들 우(瑀)가 실권을 잡고 정방(政房)을 통하여 백관의 인사를 전단(專斷)하였으므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258년 3월 대사성 유경(柳璥)과 별장 김인준(金仁俊)이 (의)를 살해 함으로써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표면상으로는 왕권이 복구되었으나, 실권은 여전히 김인준과 임연(林衍)부자에게 있었다.
대외적으로도 즉위 초기인 1216년부터 3년간 계속된 거란의 침입과 뒤이은 몽고의 침입으로 재위기간은 최대의 국난을 겪은 시기였다.


■ 몽고의 침입
특히, 1231년부터 30여년간에 걸친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도(江都:江華)로 천도하며 28년간 항쟁하였으나 막대한 인명손실과 국토의 황폐를 가져 왔다.
그리고 1232년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된 현종 때의 대장경판(大藏經板) 이 소실되고, 1235년 경주의 황룡사 구층탑이 소실되는 등 귀중한 문화재의 손실을 입었다.
그리하여 고종은 여러 차례의 강화교섭 끝에 1259년 몽고와 강화를 청하기 위하여 태자 전(뒤의 元宗)을 몽고에 보냈다. 그리고 무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몽고병으로 하여금 강화의 내성과 외성을 헐게 하였다.
이와같은 태자의 친조(親朝)와 성곽의 철거는 몽고에 대한 굴복을 뜻하는 것으로, 그뒤 고려는 몽고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한편, 1236년 몽고항쟁 당시 불력(佛力)에 의하여 몽고군을 격퇴하고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 소실된 대장경판의 재각(再刻)에 착수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팔만대장경이었다.
이에 앞서 1227년 감수국사 평장사(監修國史平章事) 최보순(崔甫淳), 수찬관 김양경(金良鏡)·임경숙(任景肅)· 유승단(兪升旦) 등으로 하여금《명종 실록》을 편찬하게 하여 사관(史館)과 해인사에 각각 보관하게 하였다.
능은 홍릉(洪陵)이며, 시호는 안효(安孝)이고, 1310년(충선왕 2) 충헌(忠憲) 이 증시되었다.
고종은 희종의 딸인 안혜왕후 유씨에게서 제24대 왕 원종과 안경공 창, 수흥궁주 등 2남1녀를 얻었다.

원종


■ 출생과 성장
원종은 고종의 맏아들이자 안혜왕후 유씨 소생으로1219년 3월에 태어났으며,이름은 식, 초명은 전, 자는 일신(日新)이다. 1235년(고종 22) 태자로 책봉되어 1259년 강화를 청하기 위하여 몽고에 갔다가 그해 고종이 죽자 이듬해 귀국하여 강안전(康安殿)에서 즉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 외교 정책
원종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몽고에 의지하였다. 그래서 그는 재위기간중 내내 친원정책을 폈다.
이러한 친원정책의 일환으로 1261년 태자를 몽고에 보내 아리패가의 평정을 축하하였고, 왕은 그 자신이 태자 때 몽고에 다녀왔고 또 태자를 몽고에 보내는 등 몽고에 성의를 표명하여 원활한 국교수립에 노력하였다.
그해 서울에 동서학당(東西學堂)을 설치하였다. 1263년 홍저·곽왕부(郭王府) 등을 일본에 보내 일본으로 하여금 해적이 고려를 침범하는 것을 단속해주도록 청하였다.
1264년 몽고가 사신을 보내 친조(親朝)를 요구하므로 몽고에 갔다 돌아왔다.
1267년 감수국사(監修國史) 이장용(李藏用), 동수국사(同修國史) 유경(柳璥), 수찬관 김구(金坵)와 허공(許珙) 등으로 하여금 신종· 희종·강종 3대의 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1268년 환도를 준비하기 위하여 개성에 출배도감(出排都監)을 설치하였다.
1269년에는 태자 심을 몽고에 보냈으며, 친몽정책과 개성환도를 추진하다 임연(林衍)에게 폐위당하여 동생 안경공 창(安慶公)이 왕위에 올랐으나, 원의 도움으로 4개월 만에 복위되어 곧 몽고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해에 서경의 최탄(崔坦) 등이 임연(林衍)을 타도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노비와 토지제도를 바로잡기 위하여 전민변정도감(田民辨 整都監)을 설치하였다.
1270년 임연이 죽자 그 아들 임유무(林惟茂)를 교정별감에 임명하여 실권을 행사하게 하였으나, 그가 모반하므로 주살하였다.
그해 태자와 더불어 몽고로부터 돌아와 개성환도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여 배중손(裴仲孫)을 중심으로한 삼별초(三別抄)가 항전을 일으키자 3년 만인 1273년에 진압하였다.
마지막 반몽세력인 삼별초가 몰락하자 고려조정은 거의 원에 복속되었으며, 1274년 원나라의 매빙사(媒聘使)가 와서 남편이 없는 부녀자 140명을 요구하므로 결혼도감(結婚都監)을 설치하고 민간의 독녀(獨女)와 역적의 처, 종의 딸 등을 뽑아 보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또한 이 해에 태자 심이 원의 부마가 됨으로써 고려에 대한 원의 입김은 더욱 강화된다. 그런 가운데 원종은 1274년 6월 태자 심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시호는 순효(順孝)이며, 원나라의 시호는 충경(忠敬)이며 능은 소릉(韶陵)이다.
원종은 장익공 김약선의 딸인 정순왕후 김씨와 종실 신안공 왕전의 딸인 경창궁주 유씨등 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정순왕후 김씨는 충렬왕을 낳았으며, 경창궁주는 시양후 이, 순안공 종, 경안궁주, 함녕궁주 등을 낳았다.

충렬왕


■ 출생과 성장
충렬왕은 원종의 맏아들이자 정순왕후 김씨 소생으로 1236년 2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거, 초명은 심(諶) 또는 춘이다.
그는 1259년 6월 고종이 죽자 몽고에 입조해 있던 원종을 대신해 임시로 국사를 대리하였으며, 1267년에 태자에 책봉되고, 1272년 원나라에 가서 세조에게 혼인 허락을 받고, 이듬해 귀국시에 몽고풍속인 변발(辯髮)과 호복(胡服)을 하여 고려인들은 탄식, 우는 자까지 있었다고 한다.


■ 왕위 등극
1274년에 원 세조의 딸 홀도로계리미실(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고, 원종이 죽자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충렬왕의 즉위는 고려의 왕실역사에서 많은 것을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즉, 대륙국가와의 왕실혼인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로써 고려는 역사의 한 전환기를 맞게 되어, 양국의 우호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었고 역대 권신들의 발호에 억눌려오던 왕실의 지위도 회복, 강화할 수 있었으나 자주성을 잃은 종속국으로 전락하여 이후 원나라의 많은 간섭을 받게 되었다.
결혼한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와서 몽고양식의 생활을 하고 사사로이 부리는 사람도 원나라에서 데려옴으로써 고려왕실에는 몽고의 풍속·언어 등이 퍼지게 되었다.
충렬왕은 철저한 친원정책을 표방하여 원의 요구를 받아들여 즉위년 10월 일본정벌이 원세조의 강요로 실행되어 1차로 여원연합군이 합포(合浦)에서 출정, 대마도는 김방경(金方慶)이 이끄는 고려군의 힘으로 무찔렀으나 뜻하지 않은 폭풍을 만나 본토정벌은 실패하였다.
1281년에 감행된 2차정벌도 폭풍을 만나 실패로 끝났다.
원나라는 이후에도 두번 더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정벌준비를 강요하여 피해가 극심하였다.
1293년 왕은 공주와 함께 동정(東征)의 불가함을 직접 호소하고자 원나라로 갔는데 이듬해 원세조의 죽음으로 동정은 그쳤다.
1290년 원나라를 괴롭히던 내안(乃顔)의 여당인 합단(合丹)이 두만강을 건너 쳐들어와 왕은 원나라에 원군파병과 천도할 것을 요청하고 강화로 피란하였다.
이 싸움은 1년반 만에 원병의 협력으로 끝났는데 합단은 교주도(交州道)로 들어와 양근(楊根)·원주를 함락하고 충주를 거쳐 연기에까지 침입하였으며, 이때 원충갑(元沖甲)·한희유(韓希愈) 등의 활약이 컸다.
이밖에도 야인(野 人)과 왜구의 잦은 침입이 있었으나 김방경의 활약으로 물리쳐 국운을 보존하였다.
원나라의 압력 밑에서도 국토 보존에 힘을 기울여 최탄(崔坦)이 몽고에 반부함으로써 생긴 동녕로(東寧路)를 원세조에게 직접 환부요청을 하여 1290 년 돌려받아 여기에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을 설치하였고, 삼별초(三別抄)의 최후근거지로 몽고에 함락되어 다루가치총관부(達魯花赤總管府)가 설치되었던 탐라를 1294년에 원나라 성종(成宗)에게서 돌려받아 제주라 고치고 목사를 두었다.


■ 원의 내정간섭
원나라의 간섭은 직접 행정에도 미쳐 관제가 분수에 넘친다고 고치기를 강요하여 1275년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僉議府)로, 추밀원(樞密 院)은 밀직사(密直司)로, 어사대(御史臺)는 감찰사(監察司)로 고치고 육부(六 部)도 폐합, 변경하여 전리사(典理司)·군부사(軍簿司)·판도사(版圖司)· 전법사(典法司)로 하였다.
그리고 조(祖)·종(宗) 대신에 왕(王)을 칭하고 충성을 뜻하는 [忠]자를 붙이게 되었으며, 선지(宣旨)도 왕지(王旨)로, 짐(朕)은 고(孤)로, 사(赦)는 유(宥)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하였다.
또한, 일본정벌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설치하였던 정동행성을 그대로 두어 내정을 간섭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밖에 몽고직제의 영향으로 생겨난 관직도 있으니 몽고식 기병이 야간순찰을 돌게 하는 순마소(巡馬所), 매 잡는 것을 임무로 하는 응방(鷹坊), 귀족의 자제로 일찍이 왕을 좇아 원나라에 질자(質子, 禿魯花)가 되었다가 순번제로 숙위(宿衛)의 임무를 맡은 홀지(忽赤, 忽只), 몽고어를 습득하게 하는 통문관(通文官) 등이 있고, 관직은 아니지만 공주를 따라온 겁령구(私屬 人) 등이 있었다.
이곳 소속 관원들은 사전(賜田)의 특권을 누리고, 원나라의 세력을 믿고 당대 세력가들로 부상하여 부역에 시달려 도망하는 양민을 모아 농장(農 莊)을 경영하고 조세를 가로채고 주현(州縣)의 부세(賦稅)를 좀먹어 양민을 괴롭혔다.
또 특수임무를 띤 별감(別監)이 자주 주현에 파견됨으로써 지방민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특히, 왕 자신이 세자나 공주가 말릴 정도로 사냥을 좋아하여 국고를 고갈시켰고 이로써 매를 관리하는 응방의 적폐는 특히 심하였다.
1298년 왕의 총애를 믿고 세력을 부리던 궁인 무비(無比)가 그 당류와 함께 세자(뒤의 충선왕)에게 주살되자 정치에 염증을 느껴 세자에게 왕위를 넘기고 태상왕(太上王)이 되었고, 원나라에서 부마 상주국 일수왕(駙馬上柱 國逸壽王)의 호를 받았다.
이해 8월 충선왕이 왕비 계국대장공주의 무고로 국인(國印)을 빼앗기고 원나라로 가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사냥과 음주가무에만 몰두하였고, 부자간의 이간을 일삼는 왕유소(王惟紹)·송린(宋璘)의 무리에 귀기울여 왕위를 서흥후 전(瑞興侯琠)에게 계승시키고 계국대장공주를 개가시키려는 음모에 동조하여 1305년 이를 성사시키려고 원나라로 직접 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武宗)의 옹립에 공이 커 원조정에서 위치가 강대해짐으로써 왕유소 일당은 처형되었고 왕도 귀국하게 되었다.
아들 충선왕을 제거하기 위해 원나라행을 강행했던 충렬왕은 비참한 몰골로 1307년 4월에 귀국길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308년 7월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능은 경릉(慶陵-開城 소재)이다.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를 비롯하여 정신부주 왕씨, 숙창원비 김씨, 시비 반주 등 4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이들 중 제국대장공주가 충선왕을 정신부주 왕씨가 강양공 자와 정녕, 명순 등 1남2녀를, 시비 반주가 소군 서를낳았다.

충선왕


■ 출생과 성장
충선왕은 충렬왕의 셋째아들이자 제국대장공주 장목왕후 소생으로 1275년 9월에 태어났으며,이름은 장(璋). 초명은 원, 몽고명은 이지리부카(益知禮普花). 자는 중앙(仲 昻)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던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1277년(충렬왕 3) 세자가 되었으며, 1295년 8월 충렬왕에게서 동첨의사· 밀직사·감찰사의 판사직을 맡아 3개월간 왕권대행을 하다가 원나라로 가 이듬해 11월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였다. 혼인식에 참석하고 귀국한 왕비 제국대장공주가 1297년 5월 병사하자 7월 문상하러 온 세자는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의 총애를 빙자, 세력을 떨 치던 궁인 무비(無比)와 그 당류 최세연(崔世延)· 도성기(陶成器) 등 40여 명을 공주를 저주하여 죽게 했다는 죄목을 씌워 참살, 유배하는 대숙청을 단행하고 이듬해 정월 정치에 뜻을 잃은 충렬왕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 왕위 등극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고려의 몽고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다. 심지어 왕이 재위기간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기거하는 전지정치를 하였으며, 이로인해 고려조정의 불안은 한층 가중되었고, 왕위를 둘러싼 암투가 진행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과 견식이 남달랐던 왕은 일찍이 수렵을 가는 부왕을 울며 말리기도 하고, 땔나무를 지고 궁으로 들어온 자의 의복이 남루함을 보고 마음 아파하기도 하였다. 총명이 너무 과하다는 진언에 "나를 어리석게 하여 손에 든 떡처럼 마음대로 주무를 작정이냐."고 호통을 치고, 왕권대행시에는 세력가들에게 땅을 빼앗겨 호소하는 백성들의 토지를 돌려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면모는 즉위한 뒤에도 나타나, 즉위 직후(1298.1.) 곧 정치·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고려가 당면하고 있던 폐단을 과감히 개혁함을 내용으로하는 30여항의 교서(敎書)를 발표하였다. 그것은 합단(哈丹) 침입시에 공을 세운 원주(原州) 고을사람들에 대한 포상과 조세·부역을 3년간 면해줄 것, 공신 자손들에 직(職)을 주고 공신전 (功臣田)을 환급해줄 것, 모든 관리의 직급을 한 계급 올려주고 중형죄(重 刑罪)를 제외한 위법자는 양용(量用)하도록 할 것, 지방에 묻혀있는 선비를 천거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세력을 빙자하여 5품직에서 3품 이상의 직을 뛰어 제수받은 자, 또는 세가(世家)의 자제이기 때문에 직을 받은 자, 또는 왕을 호위하여 원나라에 다녀온 것을 공이라 하여 공신의 칭호를 받은 자들에 대해서는 선법 (選法)에 따라 처리하게 하였다. 이러한 인사행정 외에도 지방행정에 과감한 혁신을 꾀하여 근래에 잦은 사고로 특수임무를 띠고 별감(別監)이 파견되어 일어나는 민폐와 지방 장관(按廉·守令)들이 세가(勢家)에 바치는 은·쌀·포(布)를 금하게 하였고, 또 안렴·수령들이 백성들에게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선물받는 것, 수령이 멋대로 임지를 옮기는 것을 금하였으며, 홀치(忽只)·응방 (鷹坊)·아가치(阿車赤)·순마(巡馬) 등 원나라와의 관계(官階)로 인하여 설치된 관청의 관원들이 받는 증여물도 일체 금하였다. 이밖에도 부역에 시달려 농토를 떠난 자들의 토지를 모으거나 함부로 사패(賜牌)라 칭하여 절이나 양반의 토지를 빼앗아 농장(農莊)을 만든 세력가의 땅을 환수하게 하고, 막대한 이(利)가 있는 염세(鹽稅)와 외관노비(外官奴婢)들이 세력가에 의하여 탈취되는 것을 금하는 경제시책을 폈다. 또한, 세력가에 붙어서 자기의 역(役)을 다하지 않은 백성이나 향리를 본 래의 역에 돌아가게 하고, 양민으로서 세력가에 눌려 천민이 되는 등 사회의 신분적 혼란이 야기되는 사회적 적폐도 제거하도록 하였다. 즉, 원나라와 관계를 맺은 뒤로는 매잡는 것을 일삼는 응방을 이용하고 몽고어를 익혀 재상이 된다든가, 원공주의 겁령구(私屬人), 또는 환관(宦官)으로 원나라에 보내졌다가 조서(詔書)를 가지고 오거나 사신으로 귀국하여 그 세력으로 재상이 된다든가,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간 공이나 군공(軍功)으로 군졸에서 몸을 일으켜 재상이 된다든가 하여 과거의 문벌귀족과는 다른 새로운 권문세가가 됨으로써 신분질서를 어지럽게 하고 또 그 세력을 이용하여 많은 부를 누리는 자가 있었다. 왕의 교서에는 이들이 정치·경제·사회의 폐단을 일으키는 장본인으로 지적되고 있어, 교서의 목적은 이들을 제거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4월에는 인사행정을 담당해오던 정방(政房)을 폐지하여 한림원(翰林 院)에 합치고, 5월에는 전면적인 관제개혁을 실시하였다. 개혁된 관제는 광정원(光政院)·자정원(資政院)·사림원(詞林院) 등 일찍이 이름을 볼 수 없던 독자적인 것이거나 충렬왕 1년 원나라의 간섭하에 고친 관제 이전의 형태(侍中,左·右僕射 등)로 복구된 것이었다. 이 중 특이한 것은 사림원인데 사림원은 왕명의 제찬(制撰)을 맡은 한림원을 강화한 것으로 여기에 정방이 맡고 있던 인사행정, 승지방(承旨房)이 맡고 있던 왕명의 출납(出納)을 더하여 권력기관화한 것으로 박전지(朴全 之) 등 신진학자인 4학사(學士)에 의하여 관장되었다. 이 관제개혁 속에는 반원적인 요소가 엿보이고 있다. 때맞추어 일어난 원공주 출신인 왕비의 질투로 인한 조비무고사건(趙妃誣告事件)은 세력가의 억압으로 인하여 신흥귀족의 공격 목표가 되고, 반원적 요소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이 강화되는 계기를 만들어, 마침내 즉위년 8월 원나라로부터 강제 퇴위를 당하여 원나라로 갔으며, 이로써 왕위는 다시 충렬왕에게 돌아가 왕은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무르게 되었다. 원나라에 장기간 머무는 동안 본국에서는 즉위 전부터 있던 왕 부자간의 불화가 표면화되어 1299년 충선왕파로 여겨지는 쿠라타이(고려명 印侯)를 중심으로 반란을 획책하였다는 한희유무고사건(韓希愈誣告事件)이 일어났고, 이어 충렬왕파에서는 왕유소(王維紹)·송린(宋麟)·석천보(石天補) 등이 주동이 되어 부자간을 이간시키며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를 서흥후 전(瑞 興侯琠)에게 개가시키고 왕위도 세습시키려는 음모를 꾸몄고 환국(還國) 을 저지하는 운동도 일으켰다. 이 불화는 1305년 충렬왕이 전왕 폐위를 직접 건의하러 원나라로 감으로써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성종(成宗)이 후계자없이 죽어 황위쟁탈전이 일어나자 왕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하이샨(海山-宗)을 도와 옹립하게 함으로써 원나라 조정에서 위치가 강대해졌고 따라서 왕유소 일당을 처형하여 부자간의 싸움은 끝이 났다. 이로써 고려 국정의 실권은 왕에게로 돌아갔다. 1308년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지고 이해 7월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올랐다. 복위한 왕은 기강의 확립, 조세의 공평, 인재등용의 개방, 공신 자재의 중용, 농장업의 장려, 동성결혼의 금지, 귀족의 횡포 엄단 등 즉위교서에 필적하는 혁신적인 복위교서를 발표하여 또 한번 혁신정치를 천명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원나라 생활에 젖어 있던 관계로 곧 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복위한 지 두달 후인 11월 제안대군 숙(齊安大君淑)에게 왕권 대행을 시키고 원나라로 감으로써 혁신정치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재위기간에는 한번도 귀국하지 않고 연경(燕京)에서 전지(傳旨)를 통하여 국정을 행하였다. 각염법을 제정하여 소금을 전매하게 함으로써 한해에 포(布)4만필의 국고수익을 늘리게 하였고 토지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귀족의 반대로 고쳤고, 또 여러 번 관제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원나라의 간섭으로 실패로 끝났다. 충선왕은 원 왕실이 부여한 지위를 누리기 위해 원나라 체류를 고집하여 무종, 인종대에 걸쳐 원 왕실의 후한 대접을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과 권력을 동시에 누렸다. 그러나 영종이 즉위하면서 입지가 약해져 토번으로 유배되었다가 1323년에 태정제가 즉위하여 연경으로 돌아와 1325년 5월 중국 연경에서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사망후 그의 시신은 고려로 옮겨져 덕릉으로 안치되었다. 충선왕은 8명의 부인을 두었다. 원나라 진왕(晋王) 감마라(甘麻刺)의 딸 계국대장공주와 조인규(趙仁規)의 딸 조비(趙妃), 서원후(西原侯) 영(瑛) 의 딸 정비(精妃), 홍규(洪奎)의 딸 순화원비(順和院妃) 홍씨이며, 충숙왕과 세자 감을 낳은 의비와 순비 허씨, 그리고 덕흥군 혜를 낳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비가 있었다.

충숙왕


■ 출생과 성장
충숙왕은 충선왕의 차남이자 몽고녀 의비 소생으로 129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만(卍). 초명은 도(燾), 몽고식 이름은 아자눌특 실리. 자는 의효(宜孝)이다.
1298년(충렬왕 25)에 강릉군(江陵君) 승선사에 봉해졌고, 뒤에 강릉대군에 봉하여졌다. 아버지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1313년에 왕위를 전위(傳位)받아 돌아와서 연경궁(延慶宮)에서 즉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0세였다.


■ 왕위 등극
충숙왕은 아버지 충선왕이 고려의 왕위를 넘겨주면서 동시에 조카 왕고를 세자로 세웠다.
또한 심양왕자리도 왕고에게 넘겨주는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왕고와의 왕위 쟁탈전을 하게 된다.
이때문에 충숙왕은 누차에 걸쳐 원나라에 소환당하는 수모를 겪다가 급기야 왕위를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1314년 백이정이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배워오자,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삼고 또 민지(閔漬)·권보(權溥) 등에게 태조 이래의 실록을 약찬(略撰)하게 하였다.
그리고 강릉도존무사사(江陵道存撫使司)를 명주(溟州:지금의 江陵)에서 등주 (登州:지금의 安邊)로 옮겼으며,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를 양광도, 경상진안도(慶尙晋安道)를 경상도, 교주도(交州道)를 회양도(淮陽道)로 고쳤다.
1315년 원나라의 강요로 귀천(貴賤)의 복색(服色)을 정하고, 동당시(東堂試) 를 응거시(應擧試)로 고쳤다.
1316년 상왕인 충선왕이 심양왕(瀋陽王)의 지위를 조카인 세자 고(暠)에게 물려주어 원실의 대우를 받게 되자, 고는 고려의 왕위를 넘보는 등 복잡한 관계를 자아내게 되었다.
1318년 제주민(濟州民) 사용(使用, 또는 士用)·김성(金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검교평리(檢校評理) 송영(宋英)을 보내어 안무(按撫)하게 하였다.
또, 그해 폐단이 많았던 사심관(事審官)을 폐지하였으며, 제폐사목소(除弊事目 所)를 설치하였다가 찰리변위도감(察理辨違都監)으로 고쳐 권세가가 점령한 전민(田民)을 색출하여 그것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또, 채무에 있어서 그 이자가 원본(元本)에 상당할 때에는 그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안향(安珦)을 문묘에 배향하였으며, 화자거집전민추고도감(火者據 執田民推考都監)을 설치하였다.
이즈음 심양왕 고는 왕위찬탈의 뜻을 품고 원나라에 무고를 하여 왕이 불려가 그곳에서 5년 동안이나 머물게 하였으며, 또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에 편입시켜 다스려달라고 청원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차츰 정치에 싫증을 느껴 한때 왕위를 심양왕에게 넘겨주려 하다가 한종유(韓宗愈) 등의 반대로 취소하고, 1330년 세자에게 양위하고 원나라에 갔다. 1332년 충혜왕이 황음무도(荒淫無道)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원나라에 의하여 폐위되자 복위되었다.
충숙왕은 원나라가 지나치게 요구하는 세공을 삭감하게 하고, 공녀(貢女)와 환관의 징발을 중지하도록 청원하는 등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심양왕과의 정권다툼에 시달리고, 원나라에서 5년 동안이나 체류하고 돌아온 뒤에는 조신(朝臣)을 접견하지 않고 정사도 돌보지 아니하였다. 성품은 엄숙하고 의지가 굳고 침착, 총명하며, 속문(屬文)을 잘하고 예서(隷 書)를 잘 썼다.
그러한 그도 복위 8년만인 1339년 3월에 지병이 악화되어 4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시호는 의효(懿孝), 원나라의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능은 의릉(毅陵:開城 소재)이다.
충숙왕은 원나라 영왕(營王) 야광티무르(也光帖 木兒)의 딸 복국장공주, 원나라 위왕(魏王) 아목가(阿木歌)의 딸 조국장 공주(曹國長公主), 몽고인 경화공주(慶華公主),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규(洪奎)의 딸 명덕태후(明德太后:德妃), 좌상시 권형의 딸 수비권씨 등 5명의 부인을 두었다. 그중 명덕태후 홍씨에게서 충혜왕과 공민왕을 얻었으며, 조국장공주에게 용산원자를 얻었다.

충혜왕


■ 출생과 성장
충혜왕은 충숙왕의 장남이자 공원왕후 홍씨 소생으로 1315년 1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정(禎),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普塔失里)이다. 1328년 원나라의 승인을 받아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330년에 정치의 염증을 느낀 충숙왕의 전위(傳位)를 받고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16세였다.


■ 왕위 등극
충혜왕은 즉위하자마자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향락과 여색에 젖어 지냈다.
즉위 후 성격마저 포악하여 실정이 계속되자 원 왕실은 충혜왕을 연경으로 소환하였고1332년 원나라에 의하여 전왕인 충숙왕이 복위하였으므로 다시 원나라로 갔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심양왕 고(瀋陽王暠)를 옹립하려는 조적등이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충혜왕이 복위하였다. 그는 본성이 호협방탕하여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후궁만도 1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기거주(起居注) 이담(李湛)의 충고와 전 군부판서(前軍簿判書) 이조년(李兆 年)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방탕한 습성을 버리지 못하여 유신들과 반목이 심하였다.
그는 관제를 개혁하여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을 다시 지공거(知貢擧)로, 정 승을 중찬(中贊), 평리를 참리(參理)로 고쳤다.
1331년에는 종래의 은병(銀甁) 통용을 금하고 한개가 오종포(五綜布)15필에 해당하는 소은병(小銀甁)을 통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원나라에게 쌍성(雙 城: 지금의 영흥)·여진· 요양(遼陽)·심양(瀋陽) 등지에 유입한 고려인의 쇄환(刷還)을 요청하였다.
그해 이학도감(吏學都監)을 설치하였으며, 5도에는 염장도감(鹽場都監)을 설 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폐지하였다.
1342년에는 식화(殖貨)에 힘써 의성창(義城倉)·덕천창(德泉倉)·보흥창(寶 興倉)의 포 4만8000필을 풀어 시장에 전포를 열게 하였다. 1343년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개성에서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등 소란이 일었다.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능을 좋지못한 데 사용하였고, 사무역(私貿 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여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다.
이에 원나라에 가있던 이운(李芸)·기철(奇轍) 등이 왕의 실정과 횡포함을 그곳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림으로써 원나라에 끌려갔고 원나라 순제는 충혜왕을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그는 게양으로 가던 도중 악양현(岳陽縣)에서 1344년 정월 30세의 일기로 죽었다. 시호는 헌효(獻孝)이고, 원나라의 시호는 충혜이며, 능은 영릉(永陵)으로 지금의 개성에 있다.
원나라 진서 무정왕 초팔의 딸 정순숙의공주와 찬성사 윤계종(尹繼宗)의 딸 희비 윤씨(禧妃尹氏), 그리고 평리(評理) 홍탁 (洪鐸)의 딸 화비 홍씨(和妃洪氏), 상인(商人) 임신(林信)의 딸 은천옹주 임씨(銀川翁主林氏)등 4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이들 중 정순숙의공주(덕녕공주)에게서 충목왕과 장녕공주를, 희비 윤씨에게서 충정왕을, 은천옹주 임씨에게서 석기를 낳아 3남 1녀를 얻었다.

충목왕


■ 출생과 성장
충목왕은 충혜왕의 맏아들이자 정순숙의공주(덕녕공주)소생으로 1337년 4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흔(昕), 몽고 이름은 팔사마타아지(八思麻朶兒只)이다.
어려서 볼모로 원나라에 가있다가 1344년 충혜왕이 죽자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총명하여, 원나라의 순제(順帝)는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 뒤이어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좌승상 상주국 고려국왕(開府儀同 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上柱國高麗國王)으로 임명하였다.
충목왕은 왕위에 오르자 그의 모후 덕녕공주가 섭정을 시작했다.
곧 신료(臣僚)들을 계고(戒告)하여 폐정을 개혁하고 백성들을 위무·구휼하는 한편, 선왕(先王)때 아첨하던 폐신(嬖臣)들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작은아버지 기(祺:뒤의 공민왕)를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현 (玹)을 익흥부원군(益興府院君)으로 봉하였으며, 이제현(李齊賢)의 상서(上 書)에 따라 보흥고(寶興庫)·덕녕고(德寧庫)·내승(內乘)·응방(鷹坊)을 폐지하여 백성들의 원한을 덜었으며 서연(書筵)을 열었다.
또한, 선왕이 지은 신궁(新宮)을 헐어 숭문관(崇文館)을 짓게 하고, 권신에 의하여 빼앗겼던 녹과전(祿科田)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같은해 금마군(金馬郡)이 기황후(奇皇后-元나라의 順帝妃)의 외향(外鄕)이므로 익 주(益州:지금의 益山)로 승격시켰다. 1346년에는 이제현 등으로 하여금 앞서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증수하게 하고, 또 충렬·충선·충숙 세 왕의 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1347년에는 정치도감(整治都監)을 두고 계림군공(鷄林郡公) 왕후(王煦), 좌 정승 김영돈(金永旽) 등 33명을 속관(屬官)으로 삼아 여러 도의 토지를 측량하게 하였다.
그러나 남의 토지를 빼앗고 불법을 자행한 기황후의 친척인 기삼만(奇三萬) 의 옥사를 계기로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으며, 1348 년에는 진휼도감(賑恤都監)을 두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덕녕공주가 국가기강을 바로 잡으며 경제 재건에 힘쓰고 있는 동안 충목왕은 급속도로 병약해져 거처를 건성사로 옮겨 요양하였지만 1348년 12월 충목왕은 모후 덕녕공주의 직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시호는 현효(顯孝), 원나라의 시호는 충목(忠穆)이며, 능은 명릉(明陵:開城 소재)이다. 충목왕은 어린 12세에 죽었기 때문에 혼인을 하지 못하여 가족이 없다.

충정왕


■ 출생과 성장
충정왕은 충혜왕의 둘째아들이자 희비 윤씨 소생으로 1338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저(몽고명은 迷思監朶兒只)이다.
1348년에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봉해졌다가 그해 12월에 충목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덕녕공주가 덕성부원군 기철과 정승왕후에게 서무를 대행시키고 충목왕의 죽음을 원에 알렸다. 그 이듬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강안전(康安殿)에서 즉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12세였다. 충정왕이 즉위하자 덕녕공주와 충정왕의 모후 희비 윤씨 사이에 세력다툼이 일어났고, 그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1350년에 왜구가 고성(固城)·죽림(竹林)·거제(巨濟) 등에 침입한 것을 합포(合浦:馬山)의 천호(千戶) 최선(崔禪) 등이 물리쳤는데, 이로부터 왜구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여 순천부(順天府)에 침입하여 조선(漕船)을 약탈하기도 하고 뒤이어 합포·장흥(長興)·동래(東萊) 등지에도 침입하였다.
그리하여 이권(李權)을 경상·전라도도지휘사(慶尙全羅道都指揮使), 유탁(柳 濯)을 전라·양광도도순문사(全羅楊廣道都巡問使)로 삼아 왜구에 대비하게 하는 한편, 왜구의 피해에 대비하여 진도현(珍島縣)을 내지(內地)로 옮겼다.
한편, 안으로는 외척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등이 횡포를 부려 정치를 문란하게 하였다. 또, 그해 운남왕(雲南王)이 사신을 보내왔다. 1351년에 왜구가 자연도(紫燕 島:仁川)·남양(南陽) 등지를 침범하였다.
또, 그해 윤택(尹澤)·이승로(李承老) 등이 왕이 어려서 국정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원나라에 청하여 원나라 순제는 고려 조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강릉부원대군 기(江陵府院大君祺-공민왕)를 왕에 오르게 하고 그는 강화에 추방되었다가 이듬해 독살을 당하니 나이 15세였다. 총릉(聰陵:開城)에 장사지냈으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공민왕


■ 출생과 성장
공민왕은 충숙왕의 차남이자 공원왕후 홍씨 소생으로 충혜왕의 동복아우이며, 이름은 전, 초명은 기(祺), 몽고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호는 이재(怡齋), 익당(益堂)이다.
일찍이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하여졌으며, 1341년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하였으며, 1344년 충목왕 즉위년에 강릉부원대군에 봉하여졌다.
1349년 원나라에서 노국대장공주를 왕비로 맞이한 2년 뒤, 원나라가 나이 어리고 외척의 전횡으로 국정을 문란하게 한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그의 뒤를 잇게 함으로써, 공주와 함께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 왕위 등극
공민왕이 즉위하던 시기인14세기 후반 원은 홍건적의 봉기로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대륙정세의 변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려의 중흥을 꾀하여 많은 개혁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으로 원나라에 반대하는 정책을 펴 몽고적 잔재를 제거하고, 잃어버린 국토 회복을 위한 북진정책을 실시하였으며, 대내적으로는 고려왕실을 허약하게 만든 친원파를 제거하고, 국가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일곱 차례에 걸친 제도 개혁을 실시하였다.
즉, 원나라가 쇠퇴해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1352년 변발·몽고식 의복 등의 몽고풍속을 폐지하였으며, 1356년 몽고의 연호·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를 복구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하던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 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일파(奇轍一派)를 숙청하였으며, 100년간이나 존속해온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하고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였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遼東)에 남아 있는 원나라의 세력을 공략하였으며, 2년 뒤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 국위를 떨쳤다.
그리고 내정에 있어서는 1352년 그동안 인사행정에 폐단이 많았던 정방(政 房)을 폐지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등의 개혁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홍건적 및 왜구의 잦은 침입과, 1363년 찬성사 김용(金鏞)의 반란, 1364년 충선왕의 셋째아들 덕흥군(德興君)옹립을 내세운 친원파 최유(崔濡) 의 반란 등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왕은 실의에 빠져, 모든 국사를 신돈 (辛旽)에게 맡기고 불공에만 전심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한 신돈은 실정을 거듭하고 왕을 해치려하므로, 그를 수원으로 귀양보낸 뒤 처형하였다. 그뒤 1372년, 명문자제들로 구성된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고, 1373년 모니노(牟尼奴)에게 우(禑)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에 봉하였다.
그런데 자제위 소속 홍륜(洪倫)이 익비를 범하여 임신시키자, 그것을 은폐할 의도로 홍륜과 그 무리들을 죽이려다가 환관 최만생의 밀고로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공민왕은 즉위 23년 만인 4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공민왕은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히기도 한다.
작품으로는 [천산대렵도 天山大獵圖]가 있다. 능은 현릉(玄陵)으로 경기도 개풍군 중서면에 있다.
공민왕은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과 혜비이씨(惠妃李 氏), 익비한씨(益妃韓氏), 정비안씨(定妃安氏), 신비염씨(愼妃廉氏), 반야 등 6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들중 반야가 우를 낳았다.

우왕


■ 출생과 성장
우왕은 공민왕의 장남이자 시비 반야의 소생으로 1365년에 태어났으며, 어릴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이며, 신돈(辛旽)의 시비(侍婢)인 반야(般 若)의 소생으로 전해진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실각하자 당시 후사가 없던 공민왕이 근신(近臣) 에게 자기가 전에 신돈의 집에 행차하여 그의 시비와 상관해서 아들을 낳은바 있음을 밝힘으로써 공민왕의 아들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뒤 신돈이 주살된 직후에 궁중에 들어가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하여졌으며, 백문보(白文寶)·전녹생(田祿生)· 정추(鄭樞)를 사부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는 궁인 한씨(韓氏)의 소생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1374년에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인임(李仁任)·왕안덕(王安德) 등에 의해서 옹립되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 왕위 등극
우왕이 즉위하자마자 북원(北元)이나 명나 라와의 복잡한 외교문제가 계속 발생하였고, 더욱이 왜구의 침탈이 극심하여 왜구가 부여와 공주를 침입하여 공주를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최영과 최무선등이 화약과 화포로 왜구를 격퇴시키는 등 매우 불안정한 정세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인임과 최영(崔瑩)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가운데 정사를 돌보지 않고 환관 또는 악소배(惡少輩)들과 사냥이나 유희를 일삼았다.
1388년(우왕 14)에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고하여 오자, 크게 분개하여 이성계(李成桂)의 반대를 물리치고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요동정벌이 실현되지 못하였을뿐 아니라, 이성계에 의하여 최영이 실각함과 동시에 폐위되어 강화도로 안치되었다.
그뒤 여흥군(驪興郡: 지금의 驪州)으로 이치(移置) 되었다가 1389년(공양왕 1) 11월에 김저(金佇)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다시 옮겨졌으며, 다음 달에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이성계 등은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 하여 우왕과 그 아들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고려사》에서도 우왕의 세가(世家)를 열전(列傳)의 반역전(叛逆 傳)에 편입시켜 신우전(辛禑傳)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은 그 진위가 가려지지 않은 채, 이성계 등의 공양왕 옹립이나 조선건국을 합리화시키려는 입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가 폐위된 뒤에 그의 아들 창이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1년 5개월만에 폐위되었으며, 신종의 7세손 공양왕이 즉위한 후 정단문학 세균형을 강릉에 보내 우왕을 죽이도록 하였다. 이때 우왕의 나이 25세였다.
우왕은 근비 이씨, 영비 최씨, 의비 노씨, 숙비 최씨, 안비 강씨, 정비 신씨, 덕비 조씨, 선비 왕씨, 현비 안씨등 9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근비 이씨에게서 창을 낳았다.

창왕


■ 출생과 성장
창왕은 우왕의 아들이며 근비 이씨 소생으로 이름은 창(昌)이다.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부왕인 우왕이 강화로 추방되자 조민수(曺敏修)와 이색(李穡)의 추천으로 익비 한씨의 교(敎)를 받아 즉위하였으며 그때 나이 9세였다.


■ 왕위 등극
우왕의 즉위는 이성계와 조민수의 세력다툼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이성계는 한동안 병을 핑계로 뒤로 물러나 있었으나 완전히 이색과 조민수가 정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1388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사헌부·판도사(版圖司)로 하여금 권문세가에 의하여 크게 무너진 토지제도를 바로잡는 방법을 의논하여 보고하게 하고, 공부(貢賦)의 법이 문란해져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므로 모든 공물을 면하게 하여 각 도의 원수(元帥)·도순문사(都巡問使)·안렴사(按廉使) 등이 군민(軍民)으로부터 사선(私膳)을 취하는 것을 금지시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죄주게 하고, 회뢰 (賄賂)가 성행하는 것을 엄히 금지하며, 형벌을 신중히 처리하게 하였다.
그해 수창궁(壽昌宮)의 창(昌)자가 왕의 이름과 같으므로 수령궁(壽寧宮)이라 고치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해 대사헌 조준(趙浚)이 토지제도가 고르지 못한 데에서 오는 여러가지 폐단을 들어 상소를 올렸고,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版圖判書)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典法判書) 조인옥 (趙仁沃) 등도 사전(私田)의 폐단을 논하고 그 개혁을 청하였다. 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이행 등이 첨설직(添設職)을 군공(軍功)이외에는 그 임명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전선법(銓選法)을 복구하여 문무(文武) 의 전주(銓注)는 이부와 병부에서 행하게 하였다. 또, 우상시(右常侍) 허응(許應)이 균전(均田)의 강행을 상소하였다.
전왕인 우왕을 강화에서 여흥군(驪興郡- 驪州郡)으로 옮겼으며, 최영(崔瑩)을 충주로 귀양보냈다가 죽였다. 이어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상서사(尙瑞司)를 두었으며,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였다.
또, 대사헌 조준이 상서하여 기인(其人) 제도가 그들을 노예와 같이 사역하여 그 고통이 심하여 도망하는 자까지 있게 됨을 들어 그 시정을 청하였다.
또한, 전법판서 조인옥이 상소하여 사원(寺院)의 토지수입과 노비의 고용은 그 소재하는 관(官)에서 수납하여 승도(僧徒)의 수를 헤아려 지급하고, 인가(人家)에 유숙하는 중은 범간(犯奸)으로 논하며, 귀천(貴賤)의 부녀는 절에 가는 것을 금하여 위반하는 자는 실절(失節)로써 논하였다.
1389년 1월 경상원수 박위가 병선 100척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또, 그해 사관(史官) 최견 등이 상소하여 사관 8명을 두되, 각각 사초(史草) 2부를 작성하여 관직을 옮길 때 1부는 춘추관에 제출하고 1부는 집에 보관하여 후일에 증거로 삼게 하고, 겸관(兼官)과 충수찬(充修撰) 이하는 견문록(見聞錄)에 의하여 각각 사초를 작성하여 춘추관에 보내며, 춘추관은 서울과 지방의 모든 관청에 통첩하여 그 베풀어 행한 바를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8월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 밀도(密度)가 옥지(玉之)를 사신으로 보내자 그를 후히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양광도도관찰사 성석린(成石璘)의 청으로 주·군에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같은 해 전객령(典客令) 김윤후(金允厚)등을 유구국에 보내어 보빙하였다. 그해 대사헌 조준 등이 상소하여 사전의 폐단을 논하고 경기(京畿)의 땅은 사대부에게 지급하고 그밖의 땅은 모두 공상(供上)과 제사의 용도에 충당하여 그것으로써 녹봉과 군수(軍需)의 비용을 충족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산기(散騎) 이상의 처로 명부(命婦)가 된 자는 재가를 금하고, 판사(判事, 정3품) 이하 6품까지의 처로서 남편이 죽은 자는 3년간 재가를 금하였다. 또 그해 전왕인 우왕을 여흥군에서 강릉부로 옮겼다.
그뒤 이성계 등이 우왕과 창왕이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씨(辛氏)라 하여 두 왕을 모두 폐위시켰다가 12월 우왕은 강릉에서, 창왕은 강화에서 각각 살해하였다. 이때 창왕의 나이는 10세였다.

공양왕


■ 출생과 성장
공양왕은 제20대 왕 신종의 6대손인 정원부원군 왕균과 그의 정실부인 왕씨 사이에서 1345년 2월 태어났으며, 이름은 요(瑤)이다. 처음에 정창부원군으로 봉해졌다가 다시 정창군으로 개봉되었으며, 1389년 11월 이성계(李成桂), 심덕부(沈德符) 등에 의하여 창왕이 폐위되자 추대 되어 고려 마지막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 왕위등극
공양왕이 즉위 후, 이성계일파의 압력과 간섭을 물리치지 못하고 우왕을 강릉에서, 창왕을 강화에서 각각 살해하였다.
재위 3년동안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쳐 몇 차례 제도를 개편했는데, 이것은 이성계 등 신진 사대부들이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선, 관제에 있어서 전리사(典理司), 판도사(版圖司), 예의사(禮儀司), 군부사(軍簿司), 전법사(典法司), 전공사(典工司) 등을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6조로 개편하고, 첨설직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개성의 오부와 동북면과 서북면의 부·주에 유학교수관을 두었으며, 과거시험에 무과를 신설하였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목적으로 주자가례를 시행하여 집집마다 가묘를 세우게 했고, 출가하여 승려가 된 이들을 찾아내어 본업에 복귀시켰다.
그리고 오교양종(五敎兩宗)의 불교계파를 없애 군대에 편입시킴과 동시에 절의 재산을 몰수하여 각 지방 관청에 소속시키는 조치도 취했다.
1390년 도선(道詵)의 비록(秘錄)에 의하여 한양으로 천도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源) 등으로 개성을 지키게 하고 백관을 분사(分司)하게 하였으나, 이듬해 민심의 동요로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경제면에 있어서는 1391년 광흥창(廣興倉), 풍저창(豊儲倉)을 서강(西江)에 세워 조운의 곡식을 비축하게 하였으며, 개성 오부에는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조준(趙浚)의 건의로 과전법을 실시하여 녹제와 전제를 개혁, 신흥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게 하였다.
또한, 인물추고도감(人物推考都監)을 두어 노비결송법을 정하였다. 1391년 이성계일파에 반대하던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정치무대는 이성계의 독무대가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조준, 정도전, 남은 등에 의하여 이성계가 왕으로 추대됨으로써 공양왕은 폐위되고 고려왕조는 끝나고 말았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간성군(杆城郡)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고, 1394년 삼척부(三陟府)로 옮겨졌다가 살해되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에 있는 고릉(高陵)인데,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에도 공양왕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 불안했던 왕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이 건국된 후 태종 16년에 이르러 공양왕으로 추봉되었다. 공양왕은 창성군 노진의 딸 순비 노씨사이에서 세자 석과 숙녕, 정신, 경화궁주 등 1남 3녀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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